어제는 비가 가볍게 날리는
오름을 천천히 누볐다.
풀잎에 맺힌 물방울로 인해
아랫도리가 젖고
나무에서 떨어진 물방울로
윗도리가 젖어도
싱그러운 초록에서 오는 깨끗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온몸을 상쾌하게 했다.
그렇게 적당한 운동으로 흘린 땀을 식혀준
막걸리가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던 하루였다.
샤워 후 한참 자고 일어나
월드컵 축구를 보기 전에
우리詩 7월호 시지를 꺼내
시를 몇 편 옮겨놓고
소엽풍란을 곁들여 본다.
♧ 수도원에서 길을 잃다 - 이애정
갈 수 없는 곳을 가고자
한다.
세월을 계단 삼아 떠나 볼까
돌아오고 싶지 않아서
길을 나선다.
중년의 여자
떠난 빈 자리는
엊저녁 써놓은
엽서 한 장
뒤돌아 본 길은
사막도, 길도
끝이 없는데
어디서는 태어나고
어디서는 죽고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어
박혀있는 시간들을 외면한 채
입구도 출구도 없는
수도원에서
길을 잃었다.
♧ 말뿌리 1 - 나병춘
- 자화상
쌀은 살이 되었고
벼는 뼈가 되었다
꽁보리나 쌀밥을 먹고 자란 나는
속이 텅 빈
뼈대 하나
파이프 하나
동산 어느 언덕에
묻힐 거냐
애욕으로 주름진 나의 살아
누구의 쌀밥이 될 거냐
희로애락으로 들쑤시던 뼈들아
누구네 피리 소리가 될 거냐?
♧ 시간의 옆구리 - 이영춘
“김도연의 소설을 읽으면 시간의 옆구리 같은 걸 느낄 수 있단 말야!"
소설가 이외수의 말이다
난 그 말의 의미를 한참 생각했다
시간의 옆구리? 시간의 옆구리라?
정상적인 상황에서 벗어난 것들
보편적인 진리에서 벗어난 것들
과거, 현재, 미래에서 툭 튕겨져 나간 것들
가야할 길 위에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
있어야할 사람 집에 다른 무엇이 살고 있는 것
과거, 현재, 미래 속에 다른 시제가 생성된 것
엉뚱한 것들, 엉뚱한 짓들,
정상적인 혹은 보편적인 상황 위에
또 하나의 엉뚱한 상황,
지하도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나라
석 박사가 되어도 일할 곳이 없는 나라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나라
툭 터져 나간 옆구리 시간의 나라
작년 가을 내 칸나는 40세 젊은 나이로
옆구리 나라로 툭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아픈 시간의 옆구리,
피 철철 흘리는 옆구리 나라의 사람들
♧ 노란 리본을 묶으며 - 공광규
이런 눈물과 우울의 봄날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출근하고
친구를 만나는 것도 미안한 시간이다
퇴근길에 청계천변 난간에 노란 리본을 묶었다
나는 리본에 검은 글씨로 미안하다고 썼다
다른 나라에서 버린 배를 사들여 와서
여객 증원을 늘려 돈을 벌려고 구조를 변경하는
자본을 허가하는 나라
배 떨림이 심하다고 문제 제기하는 노동자를
해고하겠다고 협박하는 나라
승객의 안전보다 선박회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나라
비정규 저임금으로 선박 노동자를 자주 바꿔치는 나라
배가 기울자
“승객 여러분, 승무원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제 자리에서 대기 하십시오.”
하고는 선장과 선원이 먼저 탈출하는 나라
사람을 먼저 구하기보다
정부에 보고할 승선인원 파악에만 분주한
재난대책본부가 있는 나라
경제는 일류이고 재난 대책은 삼류인
사람 중심이 아닌 돈 중심의 나라
한 사람의 죽음에서도 그 나라를 본다고 하는데
어린 수백의 죽음 앞에서 나는 나라의 침몰을 보았다
이런 나라의 정당에 가입하고 집단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광화문 촛불 앞에서는
검은 글씨로 극락에서는 행복하라는 메모를 붙였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엄마가 빨아서 넌 교복을, 체육복을 입고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는 너희들에게 미안했다
♧ 너를 보낸다 - 권순자
사막보다 더 삭막한 바다
아름다운 목숨들이 꽃처럼 스러져갔구나
기울어가던 뱃속
차가운 물속에서
간절하던 소원이 신기루처럼 사라져갔구나
사납고 무서운 돈의
노예들이 저벅저벅 걸어 다니는 바다는
양심을 저버린 손들이 넘실대는 바다는
입을 다물었구나
슬픔으로 날마다 철썩대며
바닷가에서 너를 기다린다
한심하고 무력하여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겠구나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겠구나
네가 웃으며 떠나가야 하는데
울면서 이 땅을 떠날까봐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하겠구나
두려움을 떨치고
그리움을 떨치고
아이야, 새로운 세상으로 훨훨 떠나가라
괴롭던 일 잊어버리고
따스하고 편안한 곳에서
즐겁게 지내거라
그리운 아이야
네 아름다운 웃음을 기억하마
너도 나의 밝은 웃음을 기억해다오
♧ 아내 - 홍해리
- 치매행致梅行 ․ 14
눈을 감아야 보입니다.
눈을 뜨면
보이지 않습니다.
한평생 살았다고 보이겠습니까?
눈 감아야, 비로소
아내가 보입니다.
♧ 낮달의 한 말씀 - 조경진
봄밤 꿈이 하도 산란하다며
부처님 뵈러 가자기에
소풍삼아 따라나섰다
공림사 길, 꽃잎은 더 없이 환한데
개울물에 손, 발도 못 씻은 몸
절의 청정한 적막에 주눅 들어
부처님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아내 따라 무릎을 꿇었다
부처님은 입을 꽉 닫고 눈을 지그시 감으신다
법당을 나서는데
‘마음은 어디 두고 허울만 왔느냐’
죽비소리, 등이 서늘하다
고요를 두드리는 풍경소리 알길 멀어
뼈 속 헛바람 떨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
‘마음은 어디 두고 왔느냐’
이명처럼 귀에 박혀 마음을 헤집는데
허공에 낮달이 한 말씀 하신다
‘부처는 자기 몸으로 부처다’*
바람이 휘익, 꽃잎 들
낙영산자락 꽃불에 마음만 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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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의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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