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속의 능소화
주말 장마전선이 제주섬을 오르내리더니
비가 제법 많이 내렸습니다.
그 동안 가뭄 속에 허덕였던
온갖 풀과 나무들이
싱싱하게 퍼지는 현장을
이틀 동안 오름에서 지켜보면서
비의 고마움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빗속에서도 의연하게
불타오르듯 피어나는
능소화의 기상이 빛납니다.
♧ 능소화 2 - 원영래
오오, 여름밤 길기도 하다
춘곤증 한 사발 마셨을까
낮술처럼 나른한 고독에 취해
시체처럼 소파에 늘어져 있는데
저 홀로 즐거운 텔레비전 소리
몽롱한 의식 돋군다.
고요한 강물처럼 느릿느릿
적막으로 흐르는 밤
요염한 웃음 뚝뚝 흘리며
엉금엉금 담장 기어 올라가는
능소화처럼
불면의 등불 환히 밝히고
이 밤 끝으로 거슬러 간다.
누구일까
선풍기 홀로 목운동하는
기나 긴 여름밤
불면의 강으로
나를 불러낸
이는
♧ 능소화 사랑 - 박인걸
찜통더위가 맹렬하던 여름
땀방울이 빗물처럼
등줄기로 타고 내릴 때도
당신을 향한 그리움으로
담장 곁을 서성입니다.
행여 당신이 오시지 않을까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며
기다리다 지칠 때면
담벼락에 팔을 걸치고
긴긴 여름 해가 지도록
자리를 뜰 수 없습니다.
별이 반짝이는 밤이 오면
오렌지 빛 등불을 모두 켜서
혹시 길을 잃으실까봐
길목 사방에 걸었습니다.
먹구름이 밀려와
천둥번개가 두렵게 해도
바람을 동반한 빗줄기가
폭포수 같이 퍼 부어도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절대로 흔들 수가 없습니다.
이제 계절은 저물고
밝혔던 등불이 가물거리며
팔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이상 버티기 힘들면
주저앉더라도 나는
오직 당신만을 기다리겠어요.
♧ 능소화 - 김승기
그대 눈물을 보이지 말어. 휘어지는 가지 끝에 매달려 겨우 참아 내는 어지럼증은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불어대는 나팔소리에 바람이 흔들리고 하늘이 흔들리고 있잖아.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하늘을 좀더 가까이하려고 온 힘을 다해 나팔을 불었기에, 처음 피었을 때의 모습으로 깨끗하게 떨어지는 것 아니겠어.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내게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 지금도 하늘에서 새가 되어 날고 별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날다가 비가 되어 들로 내리고 산으로 내려 다시 꽃으로 피면서, 웃음이 아지랑이로 피어나고 있잖아. 그대 눈물을 보이지 말어. 들에서 산에서 홀로 피는 모습도 좋겠지만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워 올리듯이 처음과 끝을 그대 곁에서 함께 하고 싶어. 힘껏 부는 나팔소리에 바람이 흔들리고 하늘이 흔들리고,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빨간 모습으로 떨어지고 있잖아.
♧ 능소화 - 최동희
구부정한 샛길 따라
생각지도 않은 옛 친구 떠올리며
혼자웃음 웃는데,
누군가 갑자기 팔을 잡았을 때의
꼭 그런 느낌
여름해가 아직 게을러
애써 그늘 찾지 않아도
그냥 걷기에 딱 좋은 아침인데,
어느 집 담을 넘는 된장찌개의
꼭 그런 맛깔
♧ 능소화 - 김윤자
어머니, 지금
일흔 세 개 생명의 촛대 들고
능소화 허릿길 휘휘 돌아
하늘로 오르신다.
가슴에 또아리 튼 몹쓸 병마는
하나씩, 둘씩 빛을 지우고
여름이 지는 날, 한줌 소나기에
부서지는 잿빛 희망
흙마당에 덩그러니 누워
채 눈감지 못한 저 눈부신 슬픔
시린 세월, 눈먼 꼭둑각시로
사랑의 독항아리
씨물까지 다 퍼주고
바싹 마른 우렁이 껍질, 빈몸
어머니,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여
연황빛 고운 입술
하늘 이슬로 목축이시며
삭은 나무 등을 빌어 오르시더니
하룻밤 찬비에
저리도 쉬이 으스러지실까.
♧ 능소화는 지고 지는데 - 松花 강 봉환
벌써 초여름 시작되고 어김없이 그 집 담장
꽃봉오리 봉긋하게 셀 수 없이 피어내리더니
지나는 모두를 언제나 멈춰 서게 하고야 만다.
님 향한 발길인지 아련히 그리움만 아롱거려
나 또한 무슨 미련, 옛 생각에 그렇게 머물까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한, 두 송이 능소화가
힘없이 수술 끝에 걸려도 떨어지기 싫은 듯
옛 생각에 잠긴 나마저 안타깝게 하는 구나
낙화 되어서도 자태가 고와선지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지만 혹여 찢어질세라 솔솔 불며
그 옛날 구중궁궐 고매한 자태로 임을 그리며
서러움에 하루같이 지새우던 비련의 여인처럼
끝까지 품위 잃지 않으려는 마지막 너의 모습
잠시나마 앙가슴에 남아있는 청초한 모습마저
이제는 잊으련다. 찬란한 주홍빛을 머금으며
변하지 않는 그리움만을 안은 체 언제까지나
가슴에만 담으련다. 엷은 너와의 능소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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