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시지(詩誌)
‘우리詩’ 8월호를 다시 펼쳐본다.
읽다가 접어둔 쪽에서부터
몇 수 옮겨
토요일 오름에 다녀오다
오등동에서 찍은 흰 부용화와 같이 올린다.
♧ 젓가락 - 민구식
날마다 몇 번씩 쥐고 놓는
묵직하고 익은 감각
선명한 황금색 문양이 매끄럽다
쥘 적마다 맞나 안 맞나
키를 재보고
들 적마다 꼭 무언가를 챙겨주는
손 안의 손
어느 날 짝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
남은 한 쪽은 우두커니 비켜서
금빛 문양 얼룩져 가고
급기야 서랍 속에 처박히고 말았지
대청소 날 불쑥 나타난 한 쪽과
서랍 속에 갇혀 있던 다른 쪽을
박박 문질러 씻고
킬ㄹ 맞추어 보고 문양 맞추어
맞잡아 보곤 했지
식탁 모퉁이에서
색이 바래고 얇아진 옆지기와
닮은꼴로 기대어
간간히 키재기를 해본다
♧ 지워지다 - 홍예영
신호등 건너에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면 안 되는데
그저 그런 이웃이 겹치더니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너와 나에게도
실금이 생기고
설명이 필요한 사이가 되었던 적 있다
비교할 수 없던 내 사랑
시간이 끼어들어 얼굴이 지워진 적 있다.
♧ 운주사 와불 - 조성국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걷고 있는 거다 저문 하늘에
빛나는 북극성 좌표 삼아
천지간을 사분사분 밟으며 오르고 있다
등명(燈明)의 눈빛 치켜뜬 연인과
나란히 맞댄 어깻죽지가 욱신거리도록
이 세상 짊어지고
저 광활한 우주로 내딛는 중이다
무릇 당신도 등짐 속의 한 짐!
♧ 사라진 우주 - 박정원
막 깨어난 애기나비가 뭉클,
나무만 보고 걷던 나를
꼼짝 못하게 묶는다
어쩜 저리 여린 깃이
애벌레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날 수는 있을까
젖은 날개는 언제 마를까
순한 그 고요 앞에서
박새의 작고 뭉툭한 검은 부리가
번개처럼 날카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긴다
있던 자리에
애기나비가 없다
소란스런 쪽으로 흰뺨박새가 유유히 사라진다
한세상이 오다가 빤히 내 보는 앞에서 쓰러진다
먼저 살아 본 이파리들이
애기나비와 박새를 번갈아 내려다보는 층층나무 아래
박새일까 쇠박새일까 진박새일까 되뇌어보는
그 짧고 짧은 사이
♧ 맷집 - 박승류
그는 헬스장에 가고 그는 병원에 간다
그는 몸에 근육을 새기는 중이고 그는 몸의 지방을 제거하는 중이다
그는 조직을 만드는 중이고 그는 집단을 해체하는 중이다
그는 확대 지향적이고 그는 축소 지향적이다
그에게는 가로무늬근조직 민무늬근조직 심근조직 등이 있다
뼈를 대상으로 관절을 움직이는 횡문근은 그가 믿고 싶은 행동대장이고
내장 벽을 형성하는 평활근은 심복인 근위무사이다
이들을 바탕으로 그는 끊임없이 무리의 평정을 도모한다
그의 조직은 중심이 아닌 변두리, 주로 지방조직이다
포화지방, 불포화지방, 트랜스지방·······
지방조직의 하나인 인지질은 세포막의 중요한 구성성분으로 활용되어
중심의 체온 유지에 지대한 역할을 하지만, 지방은 역시 지방
“중심이 되지 못하면 퇴출된다, 도태되느니 자폭한다”
그의 생각이다
그는 늘 영역 확장을 꿈꾸고, 그는 늘 중앙무대를 꿈꾸지만
그들의 서식지는 동일하다
계係, 파派, 사단師團의 보스가 되려는 욕망 또한 다르지 않다
♧ 별이 빛나는 밤 - 김석규
바로 턱밑에까지 황소울음은 또 차올라 와서
한 그루 생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숲을 이루고 남는 밤
하늘엔 별이 총총 땅엔 모래알 반짝반짝
동냥자루 어깨에 둘러메고 터덜터덜 가는 그림자
사자자리의 코앞을 지나가기도 하도
한 쪽 팔을 뻗쳐 위협하는 전갈자리도 지나고
바마다 하늘가지 비럭질 나서는 사나이
땅에도 없는 복이 하늘에 간들 남아 있겠는가
붕어빵 장수 불빛으로 울음은 또 북받쳐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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