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경업 시인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최초로 종주한
1970년대 부산지역의 전설적 산악인이다.
1977년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등반하고
1982년 부산지역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 등반대장을 맡았다.
1990년에는 백두대간 연작시 60여 편을
월간 ‘사람과 山’에 연재,
산악시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산악운동의 문학적 위상을 높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는 일제(日帝)가 역사 속에서 지워버린
우리 산줄기 이름들을 되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2005년에는 남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을 올랐다.
국내의 많은 암, 빙벽길을 개척했으며,
50여 회에 걸친 히말라야 탐사와 7년간의 노력 끝에
2011년 4월에는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를 결성하여
에베레스트의 길목 체불룽에 한국자선병원,
‘히말라야토토하얀병원’을 건립했다.
그는 행동하고 실천하는 시인으로,
모임 ‘농심마니’를 통해 30여 년 동안
이 땅의 산자락에 산삼심기 운동을 전개했고,
1989년부터 시작된 매일 약 400여 명의 결식노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현재까지 운영해오고 있으며,
젊음을 산에 바친 일련의 산행경험을
이 땅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보편적 정서로
산악시의 작업에 몰두해왔다.
‘자랑스런 부산 시민상’과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으며,
현재 사단법인 ‘아름다운 사람들’의 대표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
시선집 ‘달빛 무게’, ‘하늘로 흐르는 강’과
시집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
‘날개 없이 하늘에 다다른’,
녹아버린 얼음 보숭이‘,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
‘오래 전, 그대도 꽃다운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었습니다’,
‘사랑이라 말해보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
‘잃어버린 산’, ‘자작 숲 움틀 무렵’,
‘내가 산이 될 때까지’,
‘어느 산친구의 젊은 7월을 위해’,
‘산정로숙’, ‘삽달령’, ‘백두대간1’까지
모두 15권을 상재했다.
♧ 산사람 가슴에는
산사람 가슴에는
봄날
술고개를 넘는
여린 꽃바람 일기도 하고
수박샘 가로
맑은 하늘 솜털 구름이 떠가듯
고요함도 있어
금정산
오리나무 푸른 숲내음
배어든다
설악골 단풍이 진다는 날은
가슴이 시려
메마른 마음의 삭정이
긁어모아
모닥불을 지피고
밤새워 술 마시는 詩情시정에 젖고
잔돌배기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일 때
거친 눈보라 헤쳐
첫눈 밟고 만나자던
산벗의 그리움을 위해
겨울 가는 길목은
설레이어라
---
* 술고개 : 부산 금정산 부채바위와 무명암 사이의 고개.
* 수박샘 : 부산 금정산 남문과 쌍계봉 사이의 샘.
* 잔돌배기 : 지리산 세석평전의 우리말.
♧ 세월 저편 두고 온 이별
알게 모르게 조개골 조금씩 푸르르고
물소리 한층 목청을 돋우었다
상수리 숲 땅거미 종종대며 내려간 뒤
문득, 소소리 바람에 실려오는
세월 저편 두고 온 이별 하나
혼자 마신 몇 잔의 소주 목에 걸리누나
칠(七)형제 침봉(針峰) 고스란히 남겨 둔
아직 한창일 사람아
숨죽여 찾아 간 그곳
오를 산이 없다면 다시 돌아오라
골 깊은 장당골 동고비도
돌아와 둥지를 틀었다
동강 난 이 땅의 산행이지만
나와 그대의 해 질 무렵은
온 산 불 지르는 단풍이려니
가슴 들끓이던 어린 날
늘상 어깨동무로 오르던 신밭꼴
지금 몽실몽실 달뜨고
탱자 울 안 능금꽃은 부풀어 부풀어
---
* 배종순과 김원겸은 시인과 함께 '77년 국내 최대의 토왕성빙폭(氷瀑)을 등방했다. 그 뒤 '86년 알프스 마의 3대 벽중의 하나인 아이거 북벽을 국내 최초로 동계 완등하고 하산 중 조난사했다. '88년 대한민국 체육 훈장 기린장이 추서되었다. 부산 금정산에 그들의 추모비가 있다.
* 칠형제봉-설악산 천불동 계곡에서 공룡릉으로 이어지는 암릉(岩陵). 암벽 등반가들의 꿈의 대상이다.
* 장당골-동부 지리산의 치밭목 동쪽 주 계곡.
♧ 산 사람은 소주를 마신다
슬픔이 흐르던 산
기쁨이 일어나던 산
그리운 산 그리운 님
못내 그리다가
도회의 뒷골목
옛 산친구를 만나
어느 선술집 쪽탁자에서
노가리목 비틀어 잡고
그리움을 달랠까
소주 싫어하는 산사람 없지
산쟁이 마음처럼 투명한 액체
마시는 만큼 솔직하게 취하는 술
슬픈 이야기에 슬퍼하고
기쁜 이야기에 기뻐하며
쪽탁자 모서리에 쌓여가는 빈 병
장구목 눈사태에 묻히고
설악골에서 동지의 주검을 메고
소주병 씻어 마시던 12탕
새벽녘 부채바위 밑에서
동문으로 술 사러 가도록
빈병 하나하나마다 취한
옛 이야기가
백두대간 종주하는
나그네의 발길에 채인다
---
* 장구목 : 제주도 한라산 용진각 대피소에서 윗세오름으로 오르는 길목의 고개.
* 설악골 : 설악산 비선대와 천화대능선 사이의 계곡. 겨울에 이곳에서 빙벽등반이 이뤄진다.
* 12탕 : 내설악 남교리에서 출발하는 12선녀탕계곡의 통칭.
* 부채바위 : 부산의 대표적 암벽훈련장. 금정산 동문과 북문사이에 있다.
♧ 쌍계봉에 가면
쌍계봉에 가면
익만 형 구수한 목소리에
강수 형 카랑한 고함이 들리고
절터 아래로
사라진 딸기밭이 보이고
구포장 가는 길
흙먼지
십리 너덜 길이 보인다
쌍계봉에 가면
김해들 지나
멀리 불모산 넘어
지는 해 붉디 붉은 노을에 물들고
모닥불가에서
나누어 마시던 대선소주에
밤 깊도록 설레이며 듣던
설악산 첫눈 쌓이는 이야기가 들린다
쌍계봉에 가면
어린 날의 꿈을 눕히던
바위밑 노숙터엔
억새 무성하고
오름짓을 그만둘 산사람 하나
그리움에 선다
---
* 쌍계봉 : 부산시 북구 만덕동에 위치한 금정산의 봉우리. 부산 암벽등반의 요람. 권강수, 현익만에 의해 개척되었음.
♧ 토왕성의 빛
푸른 빙벽은
계곡을 흐르던 달빛의 결정이다
날개없이 하늘에 다다를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길이며
젊은 날 오르려했던
많은 산꾼들의 이상향이었다
처음 보는 이들 눈멀게 하던 차가운 빛
목메이던 한번의 오름짓은
모두의 부러움이었으며
밤이면 먼 바다의 오징어잡이 集魚燈집어등
돌아가야 할 지상의 좌표로 떠다녔다
아침이면 오름꾼의 정열
동녘바다의 해처럼 타올라
세찬바람이
호, 희, 순, 식, 겸, 진의 사이를 헤집어도
우정은 노적봉의 자작만큼 빛났고
사랑은 비룡폭포 두터운 얼음장 밑
도란거리는 물처럼 쉼없이 흘렀다
이제 우리들 사이에는
아득한 그리움이 설악의 능선처럼 자리했는데
젊은 꿈을 키우던 금정산 비탈로
그대들 뿌려둔 토왕성의 빛이
오월의 푸르름으로 번져오른다
---
* 토왕성 : 외설악에 있는 수직 고도차 약 400m의 국내 최대 빙벽
♧ 사랑해야지
반야봉 마루위로
지는 노을은
그대
절망의 세월에 바라본
황홀한 낙일
토왕 상단에
전별 스러지고
거친 바람 멎는 어둑새벽
가슴 아리도록 고운
그대
슬픈 눈빛이어라
차氏집 추녀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사랑에 겨워하던
그대
5월의 눈물을 찾아
언젠가는 가야지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 하고
슬픈 것 슬퍼하는
그런 날로 가야지
그리고 사랑해야지
---
* 반야봉 : 지리산 서쪽에 있는 봉우리.
* 차氏집 : 금정산 동문에 있는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주막.
'국내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 갈맷길 2코스를 걷다 (0) | 2014.11.26 |
---|---|
해동 용궁사의 동자승들 (0) | 2014.11.20 |
처음 오른 금정산 (0) | 2014.11.18 |
계룡산의 능선을 보며(1) (0) | 2014.11.14 |
계룡산 갑사 가는 길 (0) | 2014.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