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2월호가 나왔다.
이상화 시인의 ‘조선병’을 권두시로 꾸며진 통권 제332호의 주요 목차와
시 몇 편을 골라 매화와 같이 올린다.
■ 권두 에세이 |조봉익
■ 신작시 14인 選
김영호 주경림 박정래 민문자 안현심 최윤경 조경진 남정화 박동남
성숙옥 오명현 윤인미 이담현 정서영
■ 기획연재 인물시詩(14) |이인평
■ 詩誌 속 작은 시집 |이범철
■ 테마가 있는 소시집 |신단향
■ 시감상 |권순진 유진
■ 이 詩 이렇게 썼다 |이민숙
■ 시집 추천 |박승류
■ 한시한담漢詩閑談 |조영임
■ 인문학 스프 |양선규
■ 수필 산책 |민순혜 마신숙
♧ 가을 숲 속을 걷는다는 것은 - 김영호
홀로
가을 숲속을 걷는다는 것은
낙엽이 내 생의 발등을 밟고
바스러지는 소리로 일어서는 어제의 날개
그 그림자를 보는 일이다.
몇 안 남은 물기 진득한 추억을
나무 가슴벽을 흔들어 마저 다 떨구고
등 뒤로 이는 바람을 재우는 일이다.
온 봄 여름, 짐승들 속병을 주던
철쭉도 산 백합화도
한갓 저 갈대에 업힌 흰 바람인 것을,
늦은 가을
숲 속을 걷는다는 것은
겨울로 간 네 생각으로
파득이다 지친 내 날개 죽지
저 낙엽의 갈한 눈빛을
꾹꾹 밟아주는 일이다.
저 갈한 눈빛의 기억을 밟아
산물소리로 다시 일어서게 하는 일이다.
♧ 로또에 거는 꿈 - 민문자
오늘도 큰 기대를 안고 기다리시는구려!
로또 당첨되면 무얼 할 것인데요?
할 것이야 많지
우선 상냥한 딸 하나 사고
당신 쏘나타 한 대 사주지
그리고 좋은 일에 쓸 거야
구상을 모두 해놨어
참 남자들은 어리석기도 해
어제저녁 때 복권 판매점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 중
여자는 한 명도 없더군!
조용히 해!
기분 나쁘면 당신 아무것도 없어
말 잘 들어야 쏘나타 사 줄 거야!
♧ 낙엽 - 최윤경
나뭇잎 쓸어 담는 빗자루 소리에
내 몸이 달그락거리고
바람은 저항하는 옷자락을 거머쥔다
지은 죄도 모르고 멱살을 잡힌 나는
주저앉아 몇 번의 숨고르기로
세상과 타협을 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길 잃은 한 마리 새가 된다
가벼워진 몸 위로
소문도 없이 이슬 꽃이 피었다
♧ 월령가 - 남장화
수세기 동안 무논이었던 곳에 수련을 심는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
공공근로에 동원된 노인 몇
발목까지 차오른 물
살랑거릴 때 허리 굽혀
모를 찌던 청춘들
이제는 달을 벗 삼아
수련이파리 닦고 있네
자양강장제 한 병이면 거뜬하다고
애써 식물의 줄기만 만지작거리다가
반월성 너머 휘영청
달 높이 떠오르면 주름진 얼굴도 두둥,
♧ 혀 - 박동남
단물과 쓴물을 동시에 내뱉는 너는 능력자
뱀의 갈라진 혀처럼 함부로 놀린다
죽음도 삶도 네게 인함이라
오만하고 교만하여 천하를 떡 주무르듯 하고
화려한 소리로 눈을 어둡게 하고 황홀에 빠지게 하고
설탕보다 달콤하고 익모초보다 쓰고 사랑의 공간도 확보하고
흥에 겨워 춤추게 하고 흥분과 분노를 일으키게 하고 축복도 하고
저주도하고 전쟁도 불사하고 화해도 하고
불이 되고 물이 되고
천사도 악마도 변신도 달변도 눌변도 불사하고 능가하는
너는 백치다 너는 천재다 너는 소리다 너는 언어다 그러나
침묵은 독배를 예고할 수 있고 성배를 예고할 수 있다
경계하라 어떤 말이 떨어질 것인가를
♧ 사랑 - 성숙옥
공중을 나는 새
풍경을 물고 떠오른다
드높은 노래를 올리는 몸짓에
내 허공도 출렁,
솟구쳐
가슴으로 쑥 들어온다
일제히 일어서는 마음의 갈기
사랑은 늘 이렇게 세차게
들어왔다가
자리 잡은 통증만 남기고 날아갔다
어둠이 칠흑 같은 곳에서
빛이 움튼다
다시 돋는 내 깃을 뽑아
박혀
흔들림 없는 천년을
돌 그림자에 그려 볼까나
♧ 물의 갑옷 - 이범철
찬 겨울
저수지는 품고 있는 물고기를 위하여
밤새 보이지 않는 추위에 대항해
갑옷을 입는다
얼음살을 만들어
단단하고 하얀 뼈를 큰소리로 뻗치고
날 선 얼음 핏줄에 온기를 넣으면
물의 갑옷은 따뜻해진다
새벽이 다 되어
저수지를 덮은 갑옷은 비로소 단단해지면
갑옷 속
물고기 한 마리
갑옷을 툭 친다 따뜻하다
이 겨울, 산간을 지나는 추위
나무는 밤새 속살을 지켜내기 위해
누군가 죽은 집처럼 하얗게
아침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 단향보검 - 신단향
-상록객잔
서슬 푸르던 검의 기세가 기울었다.
햇볕과 바람과 달빛을 베어 놓고
붉은 향기 내뿜으며 전신으로 울던 단향보검이라.
불 구덕 속에 내던져져
제 한 몸 벼리고
매정한 폭포 속에서 울기도 했느니
스스로 영웅이라 뻐기던 자들의 목을 베던 신공도
이제 퇴색하고
퇴역 검객처럼
웃음이나 팔며 호객하는 신세가 되었구나
칙칙하고 날 빠진 무쇠여,
날 세고 번득이던 시절이여,
무딘 식칼이 되어 살코기나 썰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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