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詩’ 2월호의 詩와 흰광대나물 꽃
산에는 비가 오는지 몰라도 마을엔 10시까지 안 온다.
어젯밤부터 엄청난 비바람이 불 것이라는 날씨 예고 때문에
산에도 못 가고, ‘우리詩’ 2월호를 읽는다.
올려놓은 시 하나하나 잘 읽어보면
어느 것 하나 역작力作 아닌 게 없다.
이 詩 한 구절 짜내느라
불면의 밤을 지새운 것도 있을 것이고,
이제까지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을 생각하면
한 수 한 수 예사스럽지가 않다.
읽으면서
몇 작품을 골라
흰광대나물 사진과 같이 올린다.
♧ 조선 병(病) - 이상화
어제나 오늘 보이는 사람마다 숨결이 막힌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반가움도 없이
참외 같은 얼굴에 선웃음이 집을 짓더라.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맛도 없이
고사리 같은 주먹에 진땀물이 굽이치더라.
저 하늘에다 봉창이나 뚫으랴 숨결이 막힌다.
♧ 연못 속의 구도자 - 김영호
창세의 하늘이 열려있는 연못 속*
나무들이 묵도를 하고 있다.
그중 가장 키가 큰 더글러스 전나무
평생 벌린 그의 운명과의 혈투
숱한 포탄의 파편이 박힌 몸이다.
서서 싸우고
서서 잠을 자며
추우면 옷을 벗고
더우면 옷을 입는 참 구도자.
고난과 안일에 무릎을 꿇지 않고
세상을 하늘로 끌어 올리는 사명
오직 그 한길만 걸었다.
거꾸로 서서, 가을의 나이에,
모든 것을 물속에 비워 내
그의 뿌리가 태양을 품었다.
그의 뿌리가 별들을 먹는다.
파란 얼음 잎새들 불길이 타오르고
바늘 상처들을 탄피처럼 흩으며
나그네의 손을 그의 가슴속으로 끌어 들여
뜨거운 피눈물을 만지게 했다.
뜨거운 피눈물을 만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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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Mukilteo시 Crown Park 마을안의 연못.
♧ 청어 - 민문자
어둑해진 다음 귀가하고 보니 아파트 경비실에 웬 택배가 왔나?
네모진 상자가 꽤 묵직도 하구나
청어 / 20
청어(靑魚) 스무 마리?
검푸르고 은빛 나는 물고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생선 맛은 청어가 제일 좋다고 하셨던 어머니 말씀이 퍼뜩 떠오른다
“일제강점기에 그 맛있는 청어는 일본인이 다 가져가서
우리는 그 청어를 먹을 수가 없었단다”
어머니께 열 마리는 가져다 드려야지
백수는 하셔야 할 텐데……
그런데 누가 이 생선을 보냈을까?
얼마 전 딸년에게 카톡을 보낸 생각이 난다
우리 딸 참 효녀야!
부끄러운지 역설법 쓰지 말라고 하더니
최고급 한우와 부산어묵, 반시(盤枾)를 보내왔었지
아마도 또 어미 생각을 한게지
확대경을 들이대며 보낸 사람을 찾았다
어!
보낸 사람은 없고 파주 한국출판물류단이라니
머릿속을 쥐가 나도록 굴려보아도
그쪽에서 생선 선물을 보낼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히 우리 집 주소와 내 이름이 적혀 있으니
잘못 배달된 것은 아니렷다?
금방 인쇄소에서 나온 듯 잉크도 마르지 않은 것 같은
한국시인 출세작 창간호 스무 권이 얌전히 인사한다
표제 사진이 넓은 바다에서 공중제비하는 청어(靑魚)다
‘한국문인협회·청어’
한국문협 시분과에서 발행한 사화집이군!
청어는 ‘푸를 靑, 말씀 語’ 젊음의 말씀이란 뜻을 지닌 출판사 이름 청어(靑語)
고소를 금치 못하며 한 권을 꺼내 펴보니
내 졸시를 포함해서 214명의 시가 검푸른 은빛으로 청어(靑魚)처럼 퍼덕이고 있다
♧ 잠시 - 안현심
산 채로 나풀거리는 촉수를 자르고, 손가락 발가락을 자르고, 팔꿈치와 무릎을 절단하더니, 무참히 허리통을 동강내는 전기톱
굉음이 요동치는 동안
하얀 살점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파트 칠층을 들여다보던 전마무가 토막 살해되는 데 걸린 시간은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잠시
아주 잠시.
♧ 오이꽃 - 신단향
잔치를 끝낸 마을이 취기로 잠든 밤, 새색시의 배탈처럼 내가 태어났다고요?
보리밥 꾹꾹 미역국에 말아도 어린 산모는 젖물이 팽팽히 돌았다지요.
계집아이가 몸서리쳐져 뒤엎어 버린 딸부자 외할머니, 바동대는 핏덩이의 사투가 가엾더라지요. 가시 오이 노란 꽃 헤집고 엉금엉금 기어오는 두 남자 아이 껴안으려다 꿈에서 깬 어머니, 내 사타구니가 몹시 허전하드라지요.
막혔던 세상 터지는 울음으로
두 번의 태생이 날줄과 씨줄로 새겨진 겁니다.
주름진 할머니의 등처럼 휜 골목길에서
늘 별똥별을 먼저 보아요.
어머니 치맛자락 속 덤으로 얻어진 생명이
마음까지 외돌아 질 때, 검은 꽃과 흰 꽃의 영혼이
샴으로 엉켜 있기 때문이지요.
진열대 위에 나란히 묶여 있는 사은품 1+1.
묻어가는 그 하나의 덤이 쓸쓸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밤의 태생을 말해 주었어요.
어머니가 묶어 놓은 끈 속에서 잠을 잤을 뿐인데 어디를 가도
나는 없었어요. 어머니,
어느 볕 좋은 날 유리벽 너머 어머니는 오이꽃 두 송이를 안고 있었는데
할머니의 환한 얼굴에 눈물꽃이 피어났습니다.
산 부엉이 울음이 다시 오이꽃을 피우는데
두 분 어디로 가셨나요?
♧ 역전 이발 - 문태준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 하루의 사용법 - 조재형
슬픔은 수령하되 눈물은 남용 말 것
주머니가 가벼우면 미소를 얹어 줄 것
지갑을 쫓지도 지갑에 쫓기지도 말고
안전거리를 확보할 것
침묵의 틈에 매운 대화를 첨가할 것
어제와 비교되며 부서진 나
이웃 동료와 더 견주는 건 금물
인맥은 사람에 국한시키지 말 것
숲 속의 풀꽃 전깃줄의 날개들
지구 밖 유성까지 인연을 넓혀 갈 것
해찰을 하는데 1할은 할애할 것
고난은 추억의 사원
시간을 가공 중이라고 자위할 것
돌아오는 길에
낯익은 별들에게 윙크하기 잊지 말 것
♧ 생의 비의秘儀 - 이민숙
산에 오르락내리락 할 때
가까이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전혀 알 수 없는
내 걸어왔고 너 날아갔으나
우리 서로 까마득히 모르는
그늘 깊은 곳 들락날락 다람쥐꼬리 같은
기미 사랑
연록의 가슴팍을 쫙 펼치는 쪽동백 가지 사이로 든
물안개 봄 물바람의 빛
가을, 겨울아침 살얼음 피리 꼬리짓거리
동그란 주먹 안에 쥘 수 없는
언뜻 저녁노을 한 새의 깃털만도 못 한
기미, 기억,
내 온전히 모르는 동안에도
골똘히 흐르는 조약돌 아래로 설핏
숨어들어버리는 흠뻑 젖은 바위의 몸
속, 그 벗길 수 없는 꽃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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