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

김창집 2016. 6. 27. 22:38




권경업 시인의 시집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

다시 읽어 본다.

 

전에 보내줘서 읽었는데,

재판을 냈는지 다시 보내왔다.

 

특별히 몇 마디 덧붙이고

사인까지 해서 보냈기에,


옛 애인과 대화하듯 다시 읽다가

어제 산에 가기 위해 모인 곳에서 찍은

자귀나무 꽃과 함께 올려 본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내 삶의 소중한 한사람이여

그대와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사랑도 이와 같아서

 

발에 꼭 맞는 신발이

어디 잘 있습니까.

신다보면 때로는 뒤꿈치도 까지고

터진 물집도 갈앉고 해서 편해지면

그때부터, 먼 길이던 험한 길이던

함께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나

사랑도 이와 같아서

때로는 삐걱이고 고통스럽더라도

굳은살 앉을 때까지 참고 가야지요.

 

아직도, 보드랍고 뽀얗던 고 앙증맞은 발의

오래된 신발로 남고 싶습니다.

   

 

 

취중진담

 

누군가의 영혼 붉게 물들이고

뜨겁게 적시려면, 아까운 인생

쪼그라들고 썩어버리기 전에 아낌없이

짓이기고 까뭉개야 한다

 

알알이 으깨지지 않고 빚어진 포도주는 없다

 

한 번도 가본일 없는 부르고뉴의 햇빛 따가운

로마네꽁띠 장원(莊園)의 지하실 어둠이

포도주를 숙성시켰듯이

시는 어둠 속에서 숙성시킨 시인의 으깨진 삶이다

 

너의 시에 내가 취하는 이유다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잿마루 한낮의 보이지 않는 별들

결 고운 밤하늘에만 반짝이듯

 

나는 어둠입니다

그대 감추어 둔 영혼 더욱 영롱하게 할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세상 깊은 꿈결이면

산중의 어둠 한결 맑아

그 어둠 짙은 만큼

 

계곡과 능선 위의 별 더욱 초롱하여

그 초롱함은 다시

어둠의 숨결이 되기에

   

 

 

처녀항해

 

맑던 하늘에 마른번개와 천둥이 치고

고요하던 뱃길에 풍랑이 일었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이력이 난 뱃사람들은 담담했지만

처녀항해의 나는 심한 멀미를 앓았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길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너 속에서, 그것은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너를 극복하리라 애써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휩쓸리고

그렇게 세상 처음 너를 만났다

 

자신이 경험 무용담으로 늘어놓는

노련한 선원들은, 히죽거리며 놀려댔지만

나는 내 속을 다 게워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풍랑 앞에 담담해지는 날이 있으리

   

 

 

사랑이라 쉽게 말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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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 쉽게 말하지 마세요

 

섬뜩하게 날선 장검(長劍)

칼집에서 뽑는 소리 같지 않습니까

 

그 말끝에, 썩둑

누군가는 베어져

 

뜨거운 눈물, 피처럼

철철 흘릴 수 있으니까요

   

 

 

달콤하기에, 허튼 약속도 믿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달콤하기에

허튼 약속도 믿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만

! 진정, 내가 전하던 귀엣말들은

허트기에 달콤했을 것입니다

 

부겐베리아 한가한 꽃그늘의

낮꿈 같은 그 몇 일간으로

저려하는 이 가슴은 무엇입니까

그대를 떠나보낸 뒤

화사하던 봄볕에 황사(黃砂) 자욱했고

피우려던 꽃잎들 애처롭게 시들었다는

이 말 한마디만 전합니다

 

오늘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내 타는 목마름엔, 다시

독주(毒酒) 말고 또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