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 시인의 시집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을
다시 읽어 본다.
전에 보내줘서 읽었는데,
재판을 냈는지 다시 보내왔다.
특별히 몇 마디 덧붙이고
사인까지 해서 보냈기에,
옛 애인과 대화하듯 다시 읽다가
어제 산에 가기 위해 모인 곳에서 찍은
자귀나무 꽃과 함께 올려 본다.
♧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내 삶의 소중한 한사람이여
그대와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 사랑도 이와 같아서
발에 꼭 맞는 신발이
어디 잘 있습니까.
신다보면 때로는 뒤꿈치도 까지고
터진 물집도 갈앉고 해서 편해지면
그때부터, 먼 길이던 험한 길이던
함께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나
사랑도 이와 같아서
때로는 삐걱이고 고통스럽더라도
굳은살 앉을 때까지 참고 가야지요.
아직도, 보드랍고 뽀얗던 고 앙증맞은 발의
오래된 신발로 남고 싶습니다.
♧ 취중진담
누군가의 영혼 붉게 물들이고
뜨겁게 적시려면, 아까운 인생
쪼그라들고 썩어버리기 전에 아낌없이
짓이기고 까뭉개야 한다
알알이 으깨지지 않고 빚어진 포도주는 없다
한 번도 가본일 없는 부르고뉴의 햇빛 따가운
로마네꽁띠 장원(莊園)의 지하실 어둠이
포도주를 숙성시켰듯이
시는 어둠 속에서 숙성시킨 시인의 으깨진 삶이다
너의 시에 내가 취하는 이유다
♧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잿마루 한낮의 보이지 않는 별들
결 고운 밤하늘에만 반짝이듯
나는 어둠입니다
그대 감추어 둔 영혼 더욱 영롱하게 할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세상 깊은 꿈결이면
산중의 어둠 한결 맑아
그 어둠 짙은 만큼
계곡과 능선 위의 별 더욱 초롱하여
그 초롱함은 다시
어둠의 숨결이 되기에
♧ 처녀항해
맑던 하늘에 마른번개와 천둥이 치고
고요하던 뱃길에 풍랑이 일었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이력이 난 뱃사람들은 담담했지만
처녀항해의 나는 심한 멀미를 앓았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길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너 속에서, 그것은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너를 극복하리라 애써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휩쓸리고
그렇게 세상 처음 너를 만났다
자신이 경험 무용담으로 늘어놓는
노련한 선원들은, 히죽거리며 놀려댔지만
나는 내 속을 다 게워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풍랑 앞에 담담해지는 날이 있으리
♧ 사랑이라 쉽게 말하지 마세요
사 - 랑, 사-르-랑
사랑이라 쉽게 말하지 마세요
섬뜩하게 날선 장검(長劍)을
칼집에서 뽑는 소리 같지 않습니까
그 말끝에, 썩둑
누군가는 베어져
뜨거운 눈물, 피처럼
철철 흘릴 수 있으니까요
♧ 달콤하기에, 허튼 약속도 믿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달콤하기에
허튼 약속도 믿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만
아! 진정, 내가 전하던 귀엣말들은
허트기에 달콤했을 것입니다
부겐베리아 한가한 꽃그늘의
낮꿈 같은 그 몇 일간으로
저려하는 이 가슴은 무엇입니까
그대를 떠나보낸 뒤
화사하던 봄볕에 황사(黃砂) 자욱했고
피우려던 꽃잎들 애처롭게 시들었다는
이 말 한마디만 전합니다
오늘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내 타는 목마름엔, 다시
독주(毒酒) 말고 또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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