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소화(宵火) 고은영의 꽃시편

김창집 2016. 7. 2. 23:42


찔레꽃

 

보아주는 이 없는

깊은 산,

그래서

물빛 서러움일레라

 

하이얀 미소

순결의 서약으로 떠도는

슬픈 입맞춤

외로운 몸짓일레라

 

우수수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깊은 언어의 침묵

, 고독한 사랑일레라

 

천년을 기다려도

만날 수 없는 임을 그리다

이는 바람에 포물선 그리는

너의 하얀 비망록

        

 

창포(菖浦) 그 슬픈 사랑

 

그대여

짧은 생마저 놓고 나 세상 떠나거든

여린 꽃잎 떨며, 떨며 강물에 숨죽여

아픈 사연 감춘 눈물 물결에 떠가더라

그리 생각하소서

 

5월 무시로 사랑 찾아

달빛 없는 어둠 밟아

그대 만날까 혹여 기다려도

 

진즉 그리운 사랑

만날 수 없어 향기 피워 보내노니

비운에 지는 단명의 설움

단 며칠

꽃피어 노래하는 피멍 든 여린 가슴

사위어 시들걸랑

 

발목 잠긴 물결마다

창포(菖浦)로 열린 가슴

그대 잔잔하여 고운 눈빛

그리운 기별이나 띄워 주소서

        

 

서러운 유월의 싸리꽃

 

들판에 무성했던 그 황홀한 바람의 미소

입안 가득 베어 물던 푸른 하늘의 향기

그것들은 먼 거리로부터 돌아와

유월에 그리움처럼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싸리꽃, 싸리꽃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행복했던 미소 뒤에 수없이 깜박거리던

따스한 별들의 온기 속에도

유월은 훌쩍 담장을 넘고

찰나의 낙화로 돌아서는 미래의 운명은

언제나 과거로 미련 없이 흘러가는 일이었다

 

그 사소한 안부조차 없는 변방에서

세월에 흩어진 그리움들을 쓸어 담다보면

퇴화된 날개로 하늘을 날아오를 수는 없다

그것은 나와 함께 썩어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무덤은 안온하다

극명한 침묵의 고요 속에

이름 없이 죽어간 자들의 묵언과

서러운 시간은 마지막 유월을 응시하고

무심하게 타들어가던 세월을 낚아도

어제는 너무 빨리 지나갔고

오늘은 하염없이 길었다

 

이제는 잊어야 한다

사랑했던 모든 추억의 도피처에서

어제의 나로부터 파생됐던 삶의 곡성들.

슬픔만큼 세상에 따뜻한 눈빛은 없다

그러므로 나의 슬픔은 지극히

아주 지극히 따뜻하다    


 

 

능소화 넝쿨진 풍경

 

장마가 걷힌 거리 말갛다

 

골목에 다홍 미소 띈 능소화

내 눈으로 걸어오더니

눈부신 한 마디

 

오늘의 행복을 너에게 줄게

 

살아 있다는 것은

슬픔도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가을 냄새 밴 바람의 몸짓

환한 한 줄기 구애

넝쿨 진 능소화에 머물다

        

 

해바라기 

 

나는 너로부터 탈골되었다

지상의 모든 기억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412개의 뼈 들이 서로 엉켜 춤을 추웠다

우리 유역에 불던 바람은

저 먼 강 하구로부터 수몰된 본능을 깨우며

모락모락 안개로 피어 올랐다

음험한 배고픔이 거리를 배회했다

 

염전 같은 거리

사랑은 비로소 어둠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몇 개의 주검이

또 다시 거리를 떠돌았다

마른 잎들은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를 물었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는 일은

다시 만남을 예고하는 여백이라고

 

나의 방은 온통 초록의 숲이다

검푸른 초록에서 나는

깊고 깊은 우울에 젖어 모더니즘을 읽는다

균형을 잃은 나의 시어들은 환기가 필요하다

사랑 지상주의에 입각한 양심과 자유를 향한 갈망은

이제야말로 선명하게 부각돼 와야 한다

 

나는 믿고 싶지 않다

불황의 그늘에 가리어진 남루한 눈물들

그 길고 지리한 염원과 의혹

이미 주검으로 돌아앉은 사랑을 부르는 허무

지독한 목마름에 뭉클하게 걸린 그것은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었다고

이제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랑은 없다

        

 

 

달맞이 꽃

 

된서리 맞은 밤이 이어졌다

파르르 달빛에 젖던 가슴 진물이 흘렀다

천지에 놓인 버려짐 보다

밀랍 같은 그리움이라

단명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밤마다 꿈을 꾸고

적 빛 마음을 파내지도 못하고

꼬치에서 허물을 벗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밤이면 침실로 찾아와

이슬 젖은 내 입을 벌린 채

오른손을 꽃술을 가슴을 덥석 물었다

 

무른 잎처럼 바스러지는 이성

고통의 쾌감으로 씹히는 일그러지는 오른손

그러나 고통의 쾌감도 견딜 만한 것이다

애초 내겐 꿈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무력한 시간을 따라 왔던 길로 가는 것이

주어진 운명인 걸 나는 알고 있다

 

고백하건대

너를 사랑이라 부르지 말라 하면

단세포적인 나는 너를 무어라 이름하랴

너를 위해 각시 탈을 쓰고

질펀한 춤사위에 젖어도

밤의 세상보다 내가 더 어둡다

 

너른 날개를 준비하지 못한 몸뚱어리에

비라도 내리면

어머니 뱃속에서 양수를 마시듯

온몸을 웅크리고 깊은 잠을 청한다

짐짓 향기가 없으므로 애당초 내게

사랑은 준비되지 않은 이방의 눈물로

        

 

꽃무릇

 

내 가슴에 그대가 심기 운 날부터

몽환에 이른 서늘한 달빛에 넋을 태우다

망각의 강도 건너지 못하고

안개 덩굴로 정적을 여는 숲

다홍 빛 기다림으로 서있었다

 

나는 그대를 만날 수 없는가

정녕 가벼운 눈인사조차 허락되지 않는

충일한 고독으로 홀로서면

사랑은 나를 모른다 도리질했다

사랑의 조건은 영원한 이별로 밖에

설 수 없는 그대와 나의 지극한 형벌인가

 

그대를 구애하면서도

천년이고 만년이고 어긋난 길로

지나쳐야만 했던 운명 속에

세속도 모르고 살았건 만

나의 눈물은 기화(氣化) 되어

사뿐히 하늘 위를 날다가

저 높은 나무 꼭대기에 앉아

지나는 바람에 그리움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