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두 - 홍준경
물안개
자욱이 젖은
화엄사 홍매
그늘에 서서
남은 한 생 ‘어이 할꼬’ 화두 하나 던져본다
나직이
지는 꽃잎이
빈손으로
가고 있다.
♧ 이번 생은 여기까지란 말이 슬펐다 - 전건호
장미 한 송이 피어나는 시간
차를 마시던 여자와 헤어졌고
어둠의 입자들은 자욱한 포말이 된다
꽃이 피어나는 사연을 캐물은 들 무엇하랴
벌어진 꽃잎에 숨어있던
한 점 어둠의 밀도가 점점 짙어지는 동안
내가 그린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를 외면하는 가로등
몇 개의 다리를 건너야
어둠의 심연 속
깊이 잠든 빛의 입자들이 깨어날까
붉은 꽃잎 흔들릴 때마다
비 맞은 나무들은 중얼거린다
꽃이 떠나가는 것은
바람의 수신호일 뿐
꽃이 변심한 것은 아니야
날마다 물 주어 키운 꽃이라도
사랑의 종점은 다르거든
우리의 종점은
당고개와 오이도
이번 생은 이게 전부란 말이 슬펐다
♧ 욕심 - 황인학
저 하늘
별 연못을요
소금쟁이가 되어
떠다니고 싶어요
별과 별 사이를 지나며
온몸으로
슥슥 쉬지 않고
글을 쓰고 싶어요
발이 부르터도 행복하겠죠?
글을 쓰되
물에 빠지지 않는
글을 쓰고 싶어요
내 문장의 시작과 끝은
동그라미
동그라미
원이고 싶어요
♧ 달려가는 길 - 최연수
놀란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외마디 비명이 방지턱을 넘고
건너뛰던 바람이 밑에 깔렸다
찰나의 명중은 우연
누군가는 과녁이 되고 누군가는 그곳을 통과한다
롤리팝처럼
나뭇가지에 끼운 달을 아껴먹던 밤, 지붕에서 담으로 건너뛰던
나비수염에게
숨소리를 달아주고 싶어
바닥에 문신한 호흡이 굳는데
눈을 떠봐 어서,
갸르릉
발톱 세운 검은 공기가 검은 그림자를 흔든다
끈적한 아스팔트가 흐른다
길고양이처럼, 속도를 비껴간 방점을 버려둔
길이 달린다
톡톡 엉덩이를 두드려주면
한껏 기분을 올려 세우던 저 얼룩무늬 한 벌
활모양으로 등을 말아 올린 자정이
허공으로 제 꼬리를 직각으로 세운다
어둠이 빳빳하게 곤두선다
♧ 동해안 자전거 종주 1 - 박은우
어젯밤
밤꽃 향 그윽한 하현달이 찾아와
불현 듯
내 가슴에 동해바다를 들여놓았다
이른 아침 강릉행 고속버스
고독한 환희에 절은 자전거를 싣고
무명 빛 새벽을 가르며 동해로 간다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오른 대관령
바튼 숨소리를 받아먹고 살던 산
이제는 온갖 시선을 받아먹고 산다
희로애락이 어우러진 초록의 군무(群舞)
바람의 지휘로 연주하고 춤을 추는
초록빛 처녀들의 뮤지컬 오페라
헐거워진 눈빛은 이내 녹아
성근 내 가슴뼈를 파랗게 적신다
♧ 송광사 가는 길 - 우정연
가을 햇살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휘어진 산길을 힘껏 끌어당긴다
늘어날 대로 늘어난 팽팽한 틈새에서
저러다 탁, 부러지면 어쩌나
더 이상 갈 길을 못 찾고 조마조마하던 차에
들녘을 알짱대던 참새 떼가 그걸 눈치챘는지
익어가는 벼와 벼 사이를 옮겨 다니며
햇살의 시위를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주고 있다
비워야 할 일도 채워야 할 일도 없다는 듯
묵언정진 중인 주암호를 끼고
한 시절이 뜨겁고 긴 송광사 가는 길
참, 아득하기만 하다
♧ 달빛 감옥 - 박두규
눈부신 빛살을 좇아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으나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찾아간 고요의 끝은 어둠이었다. 나의 고요는 달빛 감옥을 살고 있었다. 눈높이로 올라오던 빛살들, 황홀한 빛의 삼매三昧는 모두 비껴간 것일까. 어둠 저편 활엽의 숲으로 달빛 너울이 밀려오고, 저자거리에 버려진 절망들이 어둠 속에서 사금파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내 고요의 끝은 세상의 어둠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름슬픈* 달빛 감옥을 살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시詩, 나의 카르마라면 이승의 밥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혀가 잘린 침묵의 감옥에서도 파옥을 꿈꾸어야 하리. 아, 빛은 어둠으로부터 오느니 어둠이 어둠으로 빛날 때까지 나는 어둠이어야 하리.
♧ 그대, 그대에게도 - 김인호
금결은결 반짝임
눈 부셔 눈이 부셔 바로 보지 못했는데
다가가 보니 출렁이는 한낱 물결이다
바라보는 각도의 차이일 뿐,
그대,
그대에게도 저토록 빛나는 기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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