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묘지 벌초길,
길 모르는 조카들 기다려 섰는데
이 흰닭의장풀 꽃 눈앞에 어른거린다.
마침 카메라를 두고 가서
얼른 휴대폰을 들고 찍었다.
아침 시간이 지나면 꽃술이 말라버린다.
곳곳에 그냥 하늘색 닭의장풀은 많이 보였으나
벌초를 하는 중간에 찍을 수도 없었다.
벌초를 하고 와 쉬면서
지난번에 읽다 둔 ‘우리詩’ 9월호를 펼쳐
시 몇 편을 옮겨 사진과 함께 올린다.
♧ 연탄 - 도경희
태풍 아그네스다
처음엔 물이 마당을 물고 들어오더니
금방 축담까지 들이닥친다
다락 높은 앞집에 보따리 짐 갖다 놓고
남아 있는 연탄
아랫방으로 옮겼다
태풍이 휩쓴 자리 물이 빠지고 사나흘
젖은 석탄더미를 치우는 일이
좀 서러웠다고 하던
그 순한 눈빛
문득 사무칠 때는
가난이 써 내려간 시집을 꺼내
한 편 또 한 편 읽어본다
♧ 단풍 - 정온유
여름이 참아낸
초록의 뒷모습
어쩜 이리 고울까
능라綾羅의 햇살까지
창공을
날아오르는
내 사랑
불새 떼
♧ 갯벌 - 임윤식
전장戰場의 한낮
그곳은 폐허같이 황량하다
포화로 벌거숭이가 된 언덕과 들판
폐선의 부서진 닻이 탱크처럼 누워있고
비목碑木 하나 찢겨진 깃발을 흔들고 있다
아직도 들릴 듯 말 듯한 함성
들판은 온통 포탄자국으로 얼룩져 있다
구멍, 구멍마다 숨죽인 눈빛들
참호에는 아직 무수한 병사들이 숨어 있다
곧 어둠이 닥쳐올 것이다
밤을 기다리는 전사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질 것이다
♧ 신호등 - 유정자
수락산 도솔봉 아래 펼쳐 놓은 간식 앞
비호처럼 달려온 살찐 야생 고양이
샛노란 눈빛이 깜빡임도 없다
그 뒤편 높게 솟은 바위
황금박쥐 닮은 까마귀 한 마리
붙박은 듯 앉아 영역을 끌어당긴다
골짜기를 따라 맑게 흘러가는 숭화동 계곡
누군가 뿌려 준 번데기 가루 아래
쏜살같이 모여드는 은빛 송사리 떼
삼각형의 꼭지점마다 푸른 신호등
오늘따라
강아지풀까지 아파트 휀스 안팎에 매달려
연신 수신호를 보내온다.
♧ 소리의 정원 - 조영심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명주바람의 숨결로 너는 온다
비강과 공명강 건너
솔 숲길 솔 향을 담은 무용선으로
고요하게 흔들리며 한 올 한 올 한삼자락 타고 한 박에 한 걸음씩 온 박으로 두 박에 반박을 차고 덧걸음 사뿐 얹어서 까치채로 재금재금 나와 반박을 스쳐 멎숨 엇박으로 잘근잘근 끊어도 끊길 듯 이어지며 맺는 듯 푸는 듯 들숨 날숨 동글동글 이음매 동글리며 온다, 왔다, 끝 선에 잡아둔 숨결을 살짝 놓아 다시 먼 곳으로 보낸다
목소리로 만든 악기, 아카펠라
공문空門을 오르내리는 소리의 춤사위 익히듯
열꽃 핀 호흡도 한 자락 입춤이면 좋겠다
♧ 사과의 아침 - 박소영
아침마다 받는 하얀 캔버스
산천이 옷 갈아입는 거라든가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 그려보다가
잘 안 그려지면
시냇물이 흐르다가 물고기와 돌멩이를 만나듯
인연을 그려보는 거야
그래도 잘 안 그려지면
어린아이처럼 그려본다면
누구도 그리지 못한 그림 그려질 거야
그러면
그러면
기쁨으로 벙그는 하루
뉴턴이 살아 있다면 무엇을 그렸을까
오늘 에덴의 동쪽은 안녕하신가요
♧ 접시의 깊이 - 금혜정
갖가지 그릇 중에
접시에도 깊이가 있다
능청스레 낮추어서
둥글어진 웃음이
멋있다
얕을 줄 아는
그 넓이의 깊은 맛
♧ 광란 - 박병대
흘린 햇빛 주워 담으며
해거름 따라 가는 길
서넠 끝머리 노을에
꺽꺽 눈물 쓸어담아
햇빛에 버무린 범벅
수족 풀어 능짓불 밝히는
창문 어두운 방
백발도 노을같이 물들어
환장하다가
종이에 풀무바람 입힌다
바람의 노래는 숨 가쁘게 쌓여
미쳐 눕는 어둠의 침묵
바람의 자유를 꿈꾸는
고요한 집
문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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