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9월호의 시(2)

김창집 2016. 9. 4. 23:01


가족묘지 벌초길,

길 모르는 조카들 기다려 섰는데

이 흰닭의장풀 꽃 눈앞에 어른거린다.

 

마침 카메라를 두고 가서

얼른 휴대폰을 들고 찍었다.

아침 시간이 지나면 꽃술이 말라버린다.

 

곳곳에 그냥 하늘색 닭의장풀은 많이 보였으나

벌초를 하는 중간에 찍을 수도 없었다.

 

벌초를 하고 와 쉬면서

지난번에 읽다 둔 우리’ 9월호를 펼쳐

시 몇 편을 옮겨 사진과 함께 올린다.

    

  

연탄 - 도경희

 

태풍 아그네스다

처음엔 물이 마당을 물고 들어오더니

금방 축담까지 들이닥친다

다락 높은 앞집에 보따리 짐 갖다 놓고

남아 있는 연탄

아랫방으로 옮겼다

태풍이 휩쓴 자리 물이 빠지고 사나흘

젖은 석탄더미를 치우는 일이

좀 서러웠다고 하던

그 순한 눈빛

문득 사무칠 때는

가난이 써 내려간 시집을 꺼내

한 편 또 한 편 읽어본다

    

 

 

단풍 - 정온유

 

여름이 참아낸

초록의 뒷모습

 

어쩜 이리 고울까

능라綾羅의 햇살까지

 

창공을

날아오르는

내 사랑

불새 떼

        

 

갯벌 - 임윤식

 

전장戰場의 한낮

그곳은 폐허같이 황량하다

포화로 벌거숭이가 된 언덕과 들판

 

폐선의 부서진 닻이 탱크처럼 누워있고

비목碑木 하나 찢겨진 깃발을 흔들고 있다

아직도 들릴 듯 말 듯한 함성

 

들판은 온통 포탄자국으로 얼룩져 있다

구멍, 구멍마다 숨죽인 눈빛들

참호에는 아직 무수한 병사들이 숨어 있다

 

곧 어둠이 닥쳐올 것이다

밤을 기다리는 전사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질 것이다

      

  

 

신호등 - 유정자


수락산 도솔봉 아래 펼쳐 놓은 간식 앞

비호처럼 달려온 살찐 야생 고양이

샛노란 눈빛이 깜빡임도 없다

 

그 뒤편 높게 솟은 바위

황금박쥐 닮은 까마귀 한 마리

붙박은 듯 앉아 영역을 끌어당긴다

 

골짜기를 따라 맑게 흘러가는 숭화동 계곡

누군가 뿌려 준 번데기 가루 아래

쏜살같이 모여드는 은빛 송사리 떼

 

삼각형의 꼭지점마다 푸른 신호등

 

오늘따라

강아지풀까지 아파트 휀스 안팎에 매달려

연신 수신호를 보내온다.

    

 

소리의 정원 - 조영심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명주바람의 숨결로 너는 온다

 

비강과 공명강 건너

솔 숲길 솔 향을 담은 무용선으로

 

고요하게 흔들리며 한 올 한 올 한삼자락 타고 한 박에 한 걸음씩 온 박으로 두 박에 반박을 차고 덧걸음 사뿐 얹어서 까치채로 재금재금 나와 반박을 스쳐 멎숨 엇박으로 잘근잘근 끊어도 끊길 듯 이어지며 맺는 듯 푸는 듯 들숨 날숨 동글동글 이음매 동글리며 온다, 왔다, 끝 선에 잡아둔 숨결을 살짝 놓아 다시 먼 곳으로 보낸다

 

목소리로 만든 악기, 아카펠라

공문空門을 오르내리는 소리의 춤사위 익히듯

열꽃 핀 호흡도 한 자락 입춤이면 좋겠다

    

 

 

사과의 아침 - 박소영

 

아침마다 받는 하얀 캔버스

 

산천이 옷 갈아입는 거라든가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 그려보다가

잘 안 그려지면

시냇물이 흐르다가 물고기와 돌멩이를 만나듯

인연을 그려보는 거야

그래도 잘 안 그려지면

어린아이처럼 그려본다면

누구도 그리지 못한 그림 그려질 거야

 

그러면

그러면

기쁨으로 벙그는 하루

 

뉴턴이 살아 있다면 무엇을 그렸을까

오늘 에덴의 동쪽은 안녕하신가요

        

 

접시의 깊이 - 금혜정

 

갖가지 그릇 중에

접시에도 깊이가 있다

능청스레 낮추어서

둥글어진 웃음이

멋있다

얕을 줄 아는

그 넓이의 깊은 맛

    

 

광란 - 박병대

 

흘린 햇빛 주워 담으며

해거름 따라 가는 길

서넠 끝머리 노을에

꺽꺽 눈물 쓸어담아

햇빛에 버무린 범벅

수족 풀어 능짓불 밝히는

창문 어두운 방

백발도 노을같이 물들어

환장하다가

종이에 풀무바람 입힌다

바람의 노래는 숨 가쁘게 쌓여

미쳐 눕는 어둠의 침묵

바람의 자유를 꿈꾸는

고요한 집

문 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