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문
좁은 이마에
숱 많은 곱슬 파머머리
어머니는 동백기름을 바르고
굴곡진 당신의 길을 곧게 참빗질 하신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고
흰 머리카락 하나 허락하지 못해서
늘 혼자이신 어머니
염색약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얼굴 가득한 주름은
자식들 앞에서 더 도드라져 가고
사람이 그립다 하시며
더 이상 흥미로울 것도 없는 문단속을
서둘러 하시는 어머니
문 앞에서만 서성이는 자식은
담을 타고 넘는 바람만도 못하여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어머니는 그리운 이 찾아 꿈에서 헤맵니다
♧ 부서지길 꿈꾸는 커튼
한 뼘 되는 부엌 창문을
스카프로 가려놓았다
불신이라는 끈에 매달아
무더운 여름 한낮엔
마음도 옷도 다 벗어버려 숨기기를 포기하고
작은 천 조각 하나면 충분하니
모두 친근한 이웃이었는데
약해지는 햇살에 비례하여
옷은 두꺼워지고 창문을 닫아걸기 시작하니
어둠이 오면
허세와 의심의 눈초리로
커튼을 쳐 놓는다네
연인들의 웃음소리에 부서져 내리는 커튼
가로등 불빛에 졸린 눈을 한 향나무는
커튼을 칠 손을 갖고 있지 않으니
부끄러울 것이 없구나
♧ 나그네의 길
흙먼지 펄펄 날리는 신작로 길을
검은 고무신 신은 소녀가 걸어가네
가끔씩 쌩쌩 달리는 버스가 왜 그리 두려운지
저만치 길 가장자리로 밀려나 위태롭게 걸어가네
산처럼 크던 동산이며
칠흑 같던 바다
비 가릴 곳 없던 신작로의 적막함
이제 나그네에게는 좁은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겨운 집들이 되었으니
따스한 봄볕 같은 온정
먼 훗날 우리 아이들도
느낄 수 있길 바라면 욕심일까
봄볕 따뜻한 초가집 마당
한 귀퉁이에 기대어
한바탕 낮잠을 청해 보자꾸나
어머니의 꾸중이 들려올지?
♧ 꽃을 기다리며
멀리서 들려오는 봄소식에
흩어지던 꽃대를 추스려 보려고
당신을 부릅니다
화분 밖으로 외출하려는 뿌리 거두어
옮겨 심은 지 2년
무성한 잎만 만지작거리다 꽃을 못 보고
베란다에서 잊혔으니
그 많던 초록 잎은 그림자였던가
키를 늘리는 초록의 몸짓과
부실한 밑 둥지에서 나온 새순의 용기로
붉게 타오르는 태양 한 수저 얻어 보렵니다
당신에게서
♧ 들꽃이 질 때면
이시돌을 향하는 차의 속도가 빨라지면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은 마음은
뒷걸음질 치고
일몰의 징조도 못 보고 맞이한 어둠
집을 찾는 아버지는 자식의 목소리를 믿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린애가 되어 하루를 살고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아버지의 날들
나비가 꽃을 떠나듯 날아가면
태풍이 지난 햇볕 좋은 날에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아도
꽃 피우다가 가는 들꽃처럼
가볍게 손 흔들어 주며 가신다
들꽃이 질 때면
앰뷸런스의 소리 다급하여
해를 떠오르게 하고
저물게도 한다
♧ 계절의 멈춘 자리
아파트를 흔들어 놓은 가을향기가
게으른 자의 이부자리를 걷어놓을 때
젖은 걸레로 말끔히 다림질해 놓은
마룻바닥 위에
뒤처진 여름 햇살이
신발도 벗지 않고 걸터앉았다
긴팔, 반팔 고민하며 현관을 나서면
바람한테 물어보고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이들 옷차림 살피다
톡 터지는 씨앗에 눈이 멀었네
도도해 보이는 외래종 민들레 옆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보도블록을 누르며 자리를 만들어 피어있는
노란 작은 꽃무리
무슨 옷을 입을까 망설이지 않으니
여름도 가을도 멈춰버렸네
♧ 세월을 가위질하다
창고 한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철제상자
설렘, 희망, 기쁨, 슬픔이 함께하던 곳
시간의 비밀번호도 없이
철커덕 열려버렸다
누런 월급봉투
애기 분유 값
팍팍한 새댁의 애간장이 검게 말라 있다
빨래줄 위에 쉬다 가버린 햇살같이
멸치 수제비였는지
김치찌개였는지 모를 것들
아이들의 서툰 편지 한 장으로 버티던 젊음까지
한 장 한 장 세월을 가위질하고
남편이 따온 무화과 한입 베어 물면
붉기를 다한 해무늬
평화로움이 스며든다네
*김성현 시집 ‘국화향이 나네요’(파우스트, 2016.)에서
사진 : 제주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국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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