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성현 시집 ‘국화향이 나네요’

김창집 2017. 1. 4. 00:15


어머니의 문

 

좁은 이마에

숱 많은 곱슬 파머머리

어머니는 동백기름을 바르고

굴곡진 당신의 길을 곧게 참빗질 하신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고

흰 머리카락 하나 허락하지 못해서

늘 혼자이신 어머니

염색약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얼굴 가득한 주름은

자식들 앞에서 더 도드라져 가고

 

사람이 그립다 하시며

더 이상 흥미로울 것도 없는 문단속을

서둘러 하시는 어머니

 

문 앞에서만 서성이는 자식은

담을 타고 넘는 바람만도 못하여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어머니는 그리운 이 찾아 꿈에서 헤맵니다

     

 

부서지길 꿈꾸는 커튼

 

한 뼘 되는 부엌 창문을

스카프로 가려놓았다

불신이라는 끈에 매달아

무더운 여름 한낮엔

마음도 옷도 다 벗어버려 숨기기를 포기하고

작은 천 조각 하나면 충분하니

모두 친근한 이웃이었는데

 

약해지는 햇살에 비례하여

옷은 두꺼워지고 창문을 닫아걸기 시작하니

어둠이 오면

허세와 의심의 눈초리로

커튼을 쳐 놓는다네

 

연인들의 웃음소리에 부서져 내리는 커튼

가로등 불빛에 졸린 눈을 한 향나무는

커튼을 칠 손을 갖고 있지 않으니

부끄러울 것이 없구나

   

 

 

나그네의 길

 

흙먼지 펄펄 날리는 신작로 길을

검은 고무신 신은 소녀가 걸어가네

 

가끔씩 쌩쌩 달리는 버스가 왜 그리 두려운지

저만치 길 가장자리로 밀려나 위태롭게 걸어가네

 

산처럼 크던 동산이며

칠흑 같던 바다

비 가릴 곳 없던 신작로의 적막함

이제 나그네에게는 좁은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겨운 집들이 되었으니

 

따스한 봄볕 같은 온정

먼 훗날 우리 아이들도

느낄 수 있길 바라면 욕심일까

 

봄볕 따뜻한 초가집 마당

한 귀퉁이에 기대어

한바탕 낮잠을 청해 보자꾸나

어머니의 꾸중이 들려올지?

     

 

꽃을 기다리며

 

멀리서 들려오는 봄소식에

흩어지던 꽃대를 추스려 보려고

당신을 부릅니다

 

화분 밖으로 외출하려는 뿌리 거두어

옮겨 심은 지 2

무성한 잎만 만지작거리다 꽃을 못 보고

베란다에서 잊혔으니

그 많던 초록 잎은 그림자였던가

 

키를 늘리는 초록의 몸짓과

부실한 밑 둥지에서 나온 새순의 용기로

붉게 타오르는 태양 한 수저 얻어 보렵니다

당신에게서

     

 

들꽃이 질 때면

 

이시돌을 향하는 차의 속도가 빨라지면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은 마음은

뒷걸음질 치고

 

일몰의 징조도 못 보고 맞이한 어둠

집을 찾는 아버지는 자식의 목소리를 믿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린애가 되어 하루를 살고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아버지의 날들

나비가 꽃을 떠나듯 날아가면

 

태풍이 지난 햇볕 좋은 날에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아도

꽃 피우다가 가는 들꽃처럼

가볍게 손 흔들어 주며 가신다

 

들꽃이 질 때면

앰뷸런스의 소리 다급하여

해를 떠오르게 하고

저물게도 한다

   

 

 

계절의 멈춘 자리

 

아파트를 흔들어 놓은 가을향기가

게으른 자의 이부자리를 걷어놓을 때

 

젖은 걸레로 말끔히 다림질해 놓은

마룻바닥 위에

뒤처진 여름 햇살이

신발도 벗지 않고 걸터앉았다

 

긴팔, 반팔 고민하며 현관을 나서면

바람한테 물어보고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이들 옷차림 살피다

톡 터지는 씨앗에 눈이 멀었네

 

도도해 보이는 외래종 민들레 옆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보도블록을 누르며 자리를 만들어 피어있는

노란 작은 꽃무리

 

무슨 옷을 입을까 망설이지 않으니

여름도 가을도 멈춰버렸네

   


세월을 가위질하다

 

창고 한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철제상자

설렘, 희망, 기쁨, 슬픔이 함께하던 곳

시간의 비밀번호도 없이

철커덕 열려버렸다

 

누런 월급봉투

애기 분유 값

팍팍한 새댁의 애간장이 검게 말라 있다

 

빨래줄 위에 쉬다 가버린 햇살같이

멸치 수제비였는지

김치찌개였는지 모를 것들

아이들의 서툰 편지 한 장으로 버티던 젊음까지

 

한 장 한 장 세월을 가위질하고

남편이 따온 무화과 한입 베어 물면

붉기를 다한 해무늬

평화로움이 스며든다네

 

 

           *김성현 시집 국화향이 나네요’(파우스트, 2016.)에서

                  사진 : 제주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국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