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치매행致梅行'에서

김창집 2017. 1. 16. 22:48


빈집 한 채

    -치매행致梅行 · 168

 

반듯하던 집이 하릴없이 기울고

지붕에 구멍이 나 비 새는 방 안

희미한 호롱불도 기름이 다했다

 

곳간의 문이 저절로 열려 버린

아니, 닫힌 것인지도 모르는

빈집 한 채

 

새들은 기억의 틈새로 날아가 버리고

여린 날개 겨우 한두 마리

날지도 못하고 땅바닥을 쪼다

애처롭게 울고 있는 다 저녁때

 

한 켜씩 정성으로 쌓아 올린 돌담을 지나

삐그덕대지도 않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거미줄만 무성하게 졸고 있는

남루의 추억 몇 장

 

사노라면 선거운 일이 한둘이랴만

방전된 기억의 금고는 녹이 슬대로 슬고

이어지던 분별의 끈은 끊어진 지 한참

집이 무너지는 것도 모르는 아둔패기 사내

 

삼오야 밝은 달밤에도 보이는 게 없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허둥대는데

어둠이 지샌대도 아침이 올 기약이 없음이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텅 빈 슬픔이여.

    

 

 

    -치매행致梅行 169

 

배고프면

밥 먹자 하고,

 

아프면

병원 가자는,

 

말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걱정 없겠다

정말 좋겠다.

     

 

삶과 죽음

    -치매행致梅行 · 170

 

사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 것은 무엇인가

 

산 것과 죽은 것은 무엇인가

살아 있다는 것과 죽은 것은 어떻게 다른가

삶과 죽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움직이면 살아 있는 것이고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은 것인가

 

움직이지 않는 나무는 죽은 것인가

식물인간은 살아 있는 것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가장 크다’,

그것도 모르고 한평생을 허송하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미련하기 짝이 없다.

     

 

일요일 오후

    -치매행致梅行 · 171

 

이제까지 한평생 75

46년을 함께 산 한 생인데

아내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남편이란 사내

일요일 하루 종일 두 사람이 부딪치는 일상

한평생 한 말이 한 말이 아니라

몇 말이 되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할 말이 많이 남아 있겠는가

오전을 무사히 보냈으니

마음이 놓인 탓인가

오후 세 시 반

촐촐한 참에 막걸리 한 병을 꺼내다

홀짝이고 있는 사이

밖으로 나가는 사람

내가 얼마나 더 늙고 낡아야

그 사람 속을 알 수 있을까

지금 알고 있다 해도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데

말라가는 웅덩이에서 힘없이 퍼덕이며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피라미 한 마리

혼자 견디다 가자며 막걸릿잔을 들이켭니다.

     

 

투명감옥

    -치매행致梅行 · 172

 

어쩌자고 아내는 저 속으로 들어갔을까

이러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밖에서 떠돌고 있다

 

아니, 아내는 밖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고

갇힌 나는 칠흑의 절벽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나가지도

아내가 들어오지도 못하는

 

투명한 유리감옥!

 

답답한 구경꾼과

안타까운 수인囚人

 

마주보고 있어도 천리 밖

먼먼 너의 목소리

 

귀를 나발喇叭처럼 열어도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

     

  

한가위 보름달

    -치매행致梅行 · 173

 

아버지 어머니,

평안히 계시는지요?

 

아버지는 1978년에 가시고

어머니는 스물세 해 뒤에 가셨습니다.

 

그러니 두 분이 가신 지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올해도 지상엔 오곡백과가 둥글둥글합니다.

그러나 제 가슴은 흉년이 들어

추석 차롓상도 차리지 못했습니다.

 

하여, 하늘 높이

달 하나 덩그마니 띄워 놓았습니다.

올해는 달떡 드시며 한가위를 지내십시오.

 

휘영청 밝은 달빛에

무릎 꿇어 큰절을 올립니다.

 

부디 불초자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아버지!

     

 

들녘

    -치매행致梅行 · 174

 

가을걷이 다 끝나고 나면

나는 가을 거지가 됩니다

불 꺼진 빈집에는

침묵의 울음이 찬바람에 사그라들고

길었던 기다림을 털어 버린

영혼의 눈썹 한 올 한 올 위로 눈이 내립니다

마지막 한 톨까지 새들에게 다 주고 난

빈 들녘이 마침내 가득해집니다

봐야 보이고 들어야 들리는

한세상 사는 일이 한 줌 바람이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깨어, 나는

날개 속에 부리를 묻고 밤을 지새는

철새들같이

이제 망각의 긴 겨울잠에 들어

윤슬처럼 반짝이며 오는 봄을 꿈꾸고 싶어

영영 깨지 않을 잠속으로 들어갑니다.

     

 

 

지뢰

    -치매행致梅行 · 175

 

아내는 민첩한 지뢰 매설 전문가

순간적으로

신출귀몰하게 작업을 완수한다

 

지뢰는 답답한 속을 드러내기 위해

불쌍한 영혼이 만들어 내는

찰나의 작품

 

녀석은 자신의 위치를 밝히는 법이 없다

터지는 굉음도 없이, 물큰

폭발한다

 

아내는 자기에게 소홀하다 싶으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여지없이 어딘가에 녀석을 묻는다

 

가진 것이라곤 시간뿐인

녀석은 터지기 위해

술래처럼 오직 기다리고 있을 뿐

 

그러니, 결코 한순간도

먼눈팔지 마라

한눈팔다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홍해리 페이스북에서

          https://www.facebook.com/hongpoet?pnref=lhc.unseen

                                                          사진 : 눈 속의 조릿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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