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랑주의보 6
누가 이곳에다 불씨 묻어 놓았을까
겨울비 트럭에 싣던 다랑쉬오름 중턱
한 줄기 연기를 따라
휘적휘적 오르는 바람
아니야, 저건 필시 산사람 행적일 거야
한밤중 영문 모른 채 동굴로 숨어들었던
다랑쉬 4·3의 잔해, 저들의 혼백일 거야
겨울날 분화구가 돌화로로 보이는 것은
수천 평 송당 억새가 항명하듯 젖는 것은
이 땅에 고백을 못한
진눈깨비 저 하얀 죄
♧ 파랑주의보 8
그대, 그대 눈빛 되비치는 탑동 바다
시신경, 모세혈관 출렁출렁 깨우고 있다
환풍기 발동선 가듯 햇미나리 썰고 있다
오늘, 독일양과에서 갓 구워낸 저녁노을
24시 해장국집 목부처럼 몰고 간다
등짝에 붙은 그리움 털지 않고 그냥 간다
간다, 밥찌꺼기, 상한 그 밥찌꺼기로
플라스틱 입간판도 싹 틔우고 싶은 봄날
사나흘 난바다 휘며 바람꽃이 일고 있다
♧ 파랑주의보 10
다시 국자골목에 별이 뜰 수 있을까
칠성통 사랑 하나 묻혀있는 보도블록
똑똑똑, 하이힐 굽으로 겨울잠 노크한다
보행자 전용도로, 자동차론 갈 수 없는
북두칠성 본뜬 길가, 해장국 가게 열면
종잣돈 끌꺽 삼켰나 휘청대는 탑동 바다
신새벽 시장에서 갓 배달된 미나리
어느 논에서 보냈나, 거머리도 몇 마리
한겨울환풍기 소리, 툴툴대는 저 소리들
우연처럼 식당 벽에 따라비오름 걸려 있다
별들 떠난 흔적인가, 일곱 개 저 분화구
산지천 은어 떼 오듯 별이 뜰 수 있을까
♧ 파랑주의보 12
4월 제주들녘엔 의문부호 투성이다
지서에 가신다던 아버지 여태 안 오고
왜 여기 목도장 하나
흘렸는지 모르겠다
누구의 제삿날일까, 둘러친 저 병풍내
진달래 생살 터지듯 마을로 물들이고
마른 내 견디지 못해 초상화로 앉아 있다
4ㆍ3은 게릴라전, 두더지 게임 같은
꺾여도 의문부호, 4월 들녘 고사리 같은
휴화산 식은 가슴팍 그어대던 이념의 불길
오십여 년 다시 쓰는 지방신문 사설처럼
‘세상에 다시 오마’ 약속이라도 하는 걸까
저물녘 손도장 찍듯
바다노을 찍고 있다
♧ 파랑주의보 13
억새 저 흐느낌은 세상일만은 아니리
낮과 밤, 이 저승 경계
다 무너진 추분 날
마지막 숟가락마저 끝내 들지 못하시던…
그땐 모슬포에도 썰물녘 아니었을까
세 차례 뇌수술 끝
종언 같은 한 마디
내일은 바다 끝자락, 소풍을 가자셨다
소풍을 가자셨다, 산이수동 발자국 화석
팔순의 세월 한 켠, 자식 묻고 돌아서는
아버님 안경의 눈빛, 먼 섬처럼 반짝인다
사서직 삼십여 년, 그도 한 권 장서藏書던가
한 생애 더듬더듬 열람하는 가을비
응회암 조간대 건넌
괭이갈매기 족적 같은
♧ 개밥바라기
저녁이면 습관처럼 오름에 돋는 별이 있다
허술한 내 출근길 오름에 돋는 별이 있다
세끼 밥 건너 뛴 적막
하늘 본다, 개밥바라기
한라산 구백고지, 명치쯤의 이 자리
산은 왜 이 곳에다 청동어 달았을까
물장올水長兀 산정호수에 내 그리움을 방생한다
저 오름도 세상에서 탁발하고 오는 걸까
청보라 섬잔대로 빈자일등 피워놓고
때맞춰 개밥그릇에 공양하듯 별이 뜬다
독경소리 듣는 것도 사치스런 그런 날
이제 내 외로움에 선고를 하고 싶다
한세상 작별을 하듯
그린마일 가고 있다
*문순자 ‘왼손도 손이다’(현대시조시인 100인선 20, 고요아침. 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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