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문순자 '파랑주의보'

김창집 2017. 1. 29. 11:41



파랑주의보 6


누가 이곳에다 불씨 묻어 놓았을까

겨울비 트럭에 싣던 다랑쉬오름 중턱

한 줄기 연기를 따라

휘적휘적 오르는 바람


아니야, 저건 필시 산사람 행적일 거야

한밤중 영문 모른 채 동굴로 숨어들었던

다랑쉬 4·3의 잔해, 저들의 혼백일 거야


겨울날 분화구가 돌화로로 보이는 것은

수천 평 송당 억새가 항명하듯 젖는 것은

이 땅에 고백을 못한

진눈깨비 저 하얀 죄

     

 

파랑주의보 8

 

그대, 그대 눈빛 되비치는 탑동 바다

시신경, 모세혈관 출렁출렁 깨우고 있다

환풍기 발동선 가듯 햇미나리 썰고 있다

 

오늘, 독일양과에서 갓 구워낸 저녁노을

24시 해장국집 목부처럼 몰고 간다

등짝에 붙은 그리움 털지 않고 그냥 간다

 

간다, 밥찌꺼기, 상한 그 밥찌꺼기로

플라스틱 입간판도 싹 틔우고 싶은 봄날

사나흘 난바다 휘며 바람꽃이 일고 있다

   

 

 

파랑주의보 10

 

다시 국자골목에 별이 뜰 수 있을까

칠성통 사랑 하나 묻혀있는 보도블록

똑똑똑, 하이힐 굽으로 겨울잠 노크한다

 

보행자 전용도로, 자동차론 갈 수 없는

북두칠성 본뜬 길가, 해장국 가게 열면

종잣돈 끌꺽 삼켰나 휘청대는 탑동 바다

 

신새벽 시장에서 갓 배달된 미나리

어느 논에서 보냈나, 거머리도 몇 마리

한겨울환풍기 소리, 툴툴대는 저 소리들

 

우연처럼 식당 벽에 따라비오름 걸려 있다

별들 떠난 흔적인가, 일곱 개 저 분화구

산지천 은어 떼 오듯 별이 뜰 수 있을까

   

 

 

파랑주의보 12

 

4월 제주들녘엔 의문부호 투성이다

지서에 가신다던 아버지 여태 안 오고

왜 여기 목도장 하나

흘렸는지 모르겠다

 

누구의 제삿날일까, 둘러친 저 병풍내

진달래 생살 터지듯 마을로 물들이고

마른 내 견디지 못해 초상화로 앉아 있다

 

43은 게릴라전, 두더지 게임 같은

꺾여도 의문부호, 4월 들녘 고사리 같은

휴화산 식은 가슴팍 그어대던 이념의 불길

 

오십여 년 다시 쓰는 지방신문 사설처럼

세상에 다시 오마약속이라도 하는 걸까

저물녘 손도장 찍듯

바다노을 찍고 있다

   

 

 

파랑주의보 13


억새 저 흐느낌은 세상일만은 아니리

낮과 밤, 이 저승 경계

다 무너진 추분 날

마지막 숟가락마저 끝내 들지 못하시던


그땐 모슬포에도 썰물녘 아니었을까

세 차례 뇌수술 끝

종언 같은 한 마디

내일은 바다 끝자락, 소풍을 가자셨다


소풍을 가자셨다, 산이수동 발자국 화석

팔순의 세월 한 켠, 자식 묻고 돌아서는

아버님 안경의 눈빛, 먼 섬처럼 반짝인다


사서직 삼십여 년, 그도 한 권 장서藏書던가

한 생애 더듬더듬 열람하는 가을비

응회암 조간대 건넌

괭이갈매기 족적 같은

     

 

개밥바라기

 

저녁이면 습관처럼 오름에 돋는 별이 있다

허술한 내 출근길 오름에 돋는 별이 있다

세끼 밥 건너 뛴 적막

하늘 본다, 개밥바라기

 

한라산 구백고지, 명치쯤의 이 자리

산은 왜 이 곳에다 청동어 달았을까

물장올水長兀 산정호수에 내 그리움을 방생한다

 

저 오름도 세상에서 탁발하고 오는 걸까

청보라 섬잔대로 빈자일등 피워놓고

때맞춰 개밥그릇에 공양하듯 별이 뜬다

 

독경소리 듣는 것도 사치스런 그런 날

이제 내 외로움에 선고를 하고 싶다

한세상 작별을 하듯

그린마일 가고 있다

 

 

        *문순자 왼손도 손이다’(현대시조시인 100인선 20, 고요아침. 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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