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벚꽃 필 무렵
바람이 없는데도 나는 흔들린다
멀리 있는 네가 바람이다
꽃은 피지만 불조심해야겠다
♧ 산벚꽃 그늘 아래
저건 소리 없는 아우성 같지만, 실은
사랑한다는
너에게 보이려는 소리 없는 고백이야
생각해 봐
저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그것도 겨울밤을, 비탈에 서서
발 동동 구르며 가슴 졸인 줄
생각해 보라구
이제사 너가 등이라도 기대주니까 말이지
저렇게 환히 웃기까지의
저 숱한 사연들을, 고스란히
몸속에 품어두었던 그 겨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니
생각해 보면, 뭐 세상 별것 아니지만
먼 산만 싸돌아다니던 너가
그저, 멧꿩 소리 한가한 날
잠시 옆에 앉아 낭랑히 시라도 몇 줄 읽어주며
“정말 곱구만 고와”
그런 따뜻한 말 몇 마디 듣고 싶었던 거라구
보라구, 봐
글쎄, 금방 글썽글썽해져
꽃잎 후두둑 눈물처럼 지우잖아
♧ 부질없다 하다가도
부질없다 하다가도
저 윤중로 벚꽃처럼, 화들짝
꽃피우는 게 사랑입니다
그러다가 우수수,
혹은 짧게 혹은 길게
속절없이 스러진다 해서
누가, 사랑 아니라 말하겠습니까
♧ 산벚꽃 꽃비 지는
꽃샘잎샘, 떨며 지새우며 피운 꽃잎
우수수 풍편(風便)에 띄워 보내는
속절없는 절망의, 저
연분홍 연하디 연한 사연
받아 쥐고, 일없다 돌아서는
너는 도대체 누구
♧ 봄볕무게
묻지 마라
저 화사한 봄볕도, 젠장 맞을
천근처럼 무거워
참꽃이 진다
♧ 화왕산 참꽃
미쳤제, 미쳤어
저 문디 가시나
우짤라고 저 지랄이고
아이고! 남사시러버라
♧ 같이 죽고 싶으면 오란다
온 몸에, 불
확 지른 화왕산 진달래
♧ 적신호
하나로는 부족했을까
위험수위라는 적신호
좀 흥감스럽긴 했지만
제 속에 것 다 꺼내 밝히다가
치사하다, 그래
너 없으면 못살겠냐며
늦동백이 한창
꺼지지도 않은 등불 내던지고 있다
♧ 바래봉 철쭉
그대 바라볼 수 있음은
소리치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화냥기라구요?
아니에요, 그저 바라만보다 시드는
바래봉 노을입니다
아니 노을 같은 눈물입니다
눈물 같은 고백입니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혹여 키 낮은 풀꽃 아닐런지요
겨우내 아린 꽃물 품어
보아줄 이 있건 없건
조그만 꽃부리 애써 여는 당신은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소리 낮추어 피는 감자난초 족두리풀
듣기에도 어색한 개불알꽃 고슴도치풀
이름 한 번 불릴 일 쉽지 않은 이 땅에
말 없는 노랑제비꽃
연보라 노루귀, 꿩의바람꽃
천덕꾸러기 엉겅퀴 들꽃이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무심히 스치는 길섶, 하찮다지만
먼지만한 씨앗으로 세상에 오던 날
하늘에는 바람, 땅에는 비 내렸습니다
척박한 땅 싹 틔워 질긴 뿌리 내리라는
그 가르침
당신은 누구십니까
*권경업 시집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도서출판 전망, 201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