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설주의보ㆍ2
늦은 밤
하늘은 세상의 한 귀퉁이를 지워버렸다.
고립의 다른 이름 유배
하늘이 마지막으로 끌어안은
애틋한 마음의 한 조각
섬
섬에 내린 눈은 섬에만 있다
미친 듯 불어대는 바람도 섬에만 분다
바람타고 발광하는 파도도
섬으로만 향한다
섬은
오랫동안 섬이었기에 사랑스러웠다
하늘은 섬을 사랑하였다
헛되이 부는 유랑 같은 희망들을
섬에서 지우기 위해
섬을 유배시켰다
잊으라
잊으라
순결하지 못한 사랑은
잊으라
잊음이란 잃음도
때론
다른 이름의 희망일 수도 있기에
거칠고 탐욕스러웠던
한 때의 눈 먼 사랑은
다 지워버리라고
섬에,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
이
내
린
다
♧ 겨울 애상ㆍ1
하루 종일
우두커니 있으면
거울처럼 마주 앉아
눈 맞추며 말 걸어 줄
사람
그립다
꼭 네가 아니라
누구여도 좋을 것만 같은
지금
찬 서리로
하얗게 꽃을 피운
유리창에
겨울비 한 줄기
흩뿌리며
무심히 지나간다
그대가 그립다
♧ 겨울 애상ㆍ2
그대 떠난 발자국 위로
삼십 년을 묵힌 눈이 내린다
무거운 것들의 중심은
움푹 패인 상처의
흔적을 메워 주는 일
가난한 땅 위에 마음을 심는 일
♧ 환지통
지난봄 허공을 움켜쥐었던 뻐드러진 가지가 보기싫어
헝클어진 머리를 자르듯이 나뭇가지를 잘라냈다
사람이 보기에는 산듯해서 좋았으나
말 못하는 나무는 겨우내 제 속에 모아두었던
투명한 눈물을 왈칵 쏟아내었다
좀처럼 마르지 않을 것 같은 비린 눈물이
손등으로 떨어져 축축이 번져갔다
이월 스산한 볕이 시름을 달래듯
눈물자국을 말려주었다
나무의 눈물이 이월 볕처럼 순해지고
하루, 이틀이 싱거운 듯 마냥 지나간 후
제비가 돌아와 집을 짓고 꽃비가 내리던 날
아픔을 내보이듯이 가지 끝이 흔들거렸다
나무의 기억은 늘 새롭게 움터오는 봄처럼 절절해
잃어버리고 빼앗겨버린 것들은 다시,
여린 잎이 되어서 허공을 단단히 물었다
절실한 봄이었으므로
나무는 온힘을 다해 버티며
허공을 온통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잘려나갔던 봄이 어마어마한 봄이 다시 돌아왔다
♧ 폭설, 2011년 겨울
사람이 죽었다
직장에서 자리를 잃은 실직자가
가정에서도 자리를 잃은 지 몇 년
갈 데 없이 거리를 헤매다 찾아 든
온기 없는 쪽방에서 벌레처럼 웅크린 채
얼어 죽었다
며칠 동안 아무도 몰랐다
시나리오 작가인 젊은 그녀가
꿈을, 뜨거운 가슴에 품고
차가운 지하 월세 방에서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조금만 달라는 얘기를
남의 집 문고리에 조심스럽게 걸어 둔 채
병과 배고픔으로 죽었다
며칠 동안 아무도 몰랐다
창 밖에선 눈이 내려
목화송이 같은 눈이 내려,
흰쌀과 같은 눈이 몇 만석이 내려,
문 밖에 수북이 쌓였다.
2011년, 백년만의 추위를 뚫고
사람들의 온기를 나눌 설이오고 있는
어느 날, 우리는 말하기에 부끄러운
사람들이 얼어 죽고 배고파 죽은 이야기를
눈보다 더 많이 추위보다 더 강하고 시끄럽게
누구의 탓인 양 목소리만 높이고
아무도 울지 않는 2011년의 겨울.
쇠잔한 어깨 위에만 쏟아지는 눈 더미처럼
짊어지고 가야할 빚만 가득한 정월
*김영미 시집 ‘물들다’(리토피아포에지ㆍ51, 2016)에서
사진 : 2017. 2. 24. 1100도로 습지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