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연옥의 봄꽃시편

김창집 2017. 2. 23. 10:08



동백꽃

 

바다의 동맥으로 강물이 흐르고

못내 추억은 저녁으로 밀려가 추락하는 생을 받아낸다

 

오늘이어서 잘린 어제, 죽지 않았다

늦지 않게 달려온 오늘이 어제를 받아내는 꽃받침으로 새벽이 열리고

한 시절 눈보라에 오므라들었던 울혈도 쏟아지는 햇살에 달짝지근히 풀리어, 꽃이 피었다

꽃잎이 너덜거리며 떨어져도 더는 두렵지 않겟다

얼었던 시간을 쓸어내며 길어지는 꽃 그림자, 가슴을 삭히고 있으니

 

진정 두려운 것은

한번 태어나면 탄생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렇다고 영원히 무덤을 가질 수도 없다는 것

강은 바다에서 끝난다지만 바다 끝에서 강이 열리고 꽃은 그림자 속에서 시간을 문다

 

심장 뛰는 속도만큼 꽃받침이 흔들거릴 때 꽃은 다시 피어나고

바람은 붉은 살내음이 되어 허공에 비린 길을 연다

     


 

 

봄밤

 

누추한 마음 한 뭉치

바람의 부력으로 석양빛을 건너간다

이내 밤이 오고

하늘과 땅이 섞인 수묵화 속에 별 하나

물집으로 앉았다

별에게도 땅이 생겼으니

일생 동안 제 몸을 터트리며 뿌리내리는 별

어느 날 인간의 마음은 꽃봉오리에 바람으로 뜨겁고

계절이 꼿꼿하게 일어서곤 하였다

물렁거리는 이 봄날

어디서 신의 마음과 섞일까

마당귀 자목련이 향기 모았던 가슴을 열며

물집 터지는 봄밤

 


 

 

능수매화 아래서

 

진눈깨비 간간한데 능수매화 피었다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꽃잎이 안간힘

꽃봉오리가 한 장 한 장 속을 뒤집어 보이며

세상 밖으로 꽃술을 드러낸다

 

만물은 자기 안에서 꽃을 자신처럼 펼치리

 

자신에게 수없이 말을 걸며

꽃은 피기까지

생각이 생각을 물어뜯으며 갈래 진 꽃잎들,

찬바람은 가지에 휘감기며 온순해지고

매화 향기가 사람들의 봄을 들어 올리고 있다

 

허공에 향기를 여는 저 개안

침묵의 격정!

마음속 진이 굳은 자리에도 눈이 생겼나

응혈된 고독이 제 속을 견디다 터지는, 꽃 같다는

이른 봄 생각

 


 

 

가파도 청보리

 

저 멀리 책장을 넘기는 물결 읽고 읽어도,

수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 듣고 들어도

지금껏 가슴에 담지 못하네

 

각질을 벗기는 파도만으로 그 속을 알려 했으니,

온몸으로 물질하는 섬

 

가파도에서 물결은 섬의 가운데서도 일어, 청보리

이쪽 바다에서 저쪽 바다로 바람이 쓸어갈 때

가슴팍에 파란 물결이 인다

매어둔 삶이 해초처럼 풀어지며

바람소리에 묻히고 바다 속에 묻히네

무덤 속도 이리 부드럽다면?

 

청보리 속에 뼈물결 일어

생의 지느러미 신명나게 흔들어보아도 좋을 듯

살이 녹아 흐르고 생각의 결들이 가슴에 출렁이는데

 

 

 

엉겅퀴꽃

 

 가시에 정전기를 안고 사네

 짓밟혔다 발이 떼이는 순간, 길이 휘어졌다 일어서며 먼지들은 꽃잎과 꽃잎 사이로 일순간 빨려든다

 꽃의 길이란

 허공에서 관절이 다 닳을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서도 허리를 펴는 일

 불황 닥친 거리에 점포정리, 원가 세일

 가장의 가래 끓는 소리가 점포 창에 달라붙었다

 한때 짧은 가시, 방전하는 향기에 나비들 모여든 적 있었으나

 향기 잠긴 거리에 가라앉지 않은 먼지들,

 컥컥거리는 호흡곤란증에 꽃잎들이 흩어진다

 길 위에 어둠이 얽히고 마음속 길들이 캄캄하다

 아직 죽을 수 없는 일!

 허공을 박차며 꼬꾸라졌다 일어서는 오기, 달라붙는 길 따라 가시가 굵어지네

 

 

                        *강연옥 시집 물마디꽃’(현대시 시인선 105, 201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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