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상에서
말갛게 씻은 하늘 한 장 옥상에 널었다
꼬들꼬들 잘 마른 햇살 몇 말 수직으로 꽂혔다
잡힐 듯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
꽃이 되고 싶은 동동 떠다니는 씨앗
새들의 음계를 비명으로 읽는다
솜사탕 구름 몇 조각 덤이다
지붕 나무 산들의 꼭대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높은 곳은 오르고 싶다
내 안에 내장된 오랜 습성 때문이다
꼭대기에 가볍게 착지한 깃털이 있단다
꼭대기는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것이라고
눈 맑은 새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골목길이 골짜기가 된다
물길 되어 흐른다
옆집 미용실 아들의 취직 명퇴한 정씨의 재취업
내 집 장만의 꿈 다 이 길로 흘러들어 왔다
방향이 같은 곳으로 흐르는 골목들
♧ 누가 그를 허공으로 밀었을까
비눗방울을 후 불었더니
저항도 못하고 허공 속으로 날아올랐다
막대를 의지했던 투명한 비눗방울이
서서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국계 플뢰르 펠르랭
출생 직후 거리에 버려져 6개월 만에
프랑스로 입양되었다는
비눗방울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거품이었다
무지갯빛 같은 반짝임은
얼굴을 타고 내린 눈물이었다
나뭇가지에게
붙잡아 달라고 절절한 마음으로 보냈던
구조신호였다
♧ 유리벽 시간
친척 집에서 보내온 고구마 한 자루
이제 귀하신 몸인지라
부엌 아랫목에 모셨다
가만히 자루 속 세상 들여다본다
그만그만한 저를 닮은 몽톡한 얼굴들
스멀스멀 오른 열기에 싹을 틔우고 있다
번식의 저 본능
그 중 생기발랄한 까만 얼굴의 그녀를
유리컵에 담아 창가에 두었다
달라진 환경에 한참 동안
몸을 움츠리고 미동이 없다
차고 견고한 유리벽을 타고 오르는 일은
지독한 고독함인가 보다
동장군 물러간 후
서서히 유리벽을 타고 오른다
삶의 레일을 이탈했다
낯선 곳으로 터전을 옮겼다
파랗게 독이 올라 입 앙다물고
긴 터널의 벽을 타고 올랐다
햇살 한 다발 끌어안은 그녀,
그렇게 꿈을 꾸고 있다
♧ 연분홍 삽화
‘용흥사 단풍이 너무 고와서’
어슴푸레 걸어오는 저녁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
붉게 익은 속 깊은 단풍나무 한 그루
파랗게 젖어 있다
색채 깊은 희수(稀壽)의 여자
아직 단풍이 곱다고
귀밑머리 하얀 목소리에 오롯이 담겨 있는
열일곱 단발머리 소녀
연분홍 꿈
♧ 민화 한 폭
담장 밑 빈터에 호박씨 몇 알 묻었다
흙은, 키를 바싹 낮춘 햇살 버무려서
온 힘으로 씨앗을 품어주고 있다
어린 날, 아침 일찍 텃밭에 간 어머니
사람들이 들끓는 오일장 날을 잡아
호박이 열리지 않은 덩굴에 매를 내렸다
어머니 가슴속에도 매가 있었다
공부가 싫다며 상경하겠다는 오빠, 책을 불사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상심한 얼굴로 마루 독 안에 책을
숨기던 어머니
학교를 졸업하고 자원입대한 그 아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잠든 밤이면
어머니는 머나먼 월남 땅 밀림 속을 서성거리곤 하셨다
그런 밤마다
어머니의 꽉 깨문 어금니 사이로 새어나오던
계면조, 그 아리던 영혼의 음률
밤은 삼백 리쯤 더 길어졌다
가슴에서 스러진 별 하나
가슴에 심고
떡잎 두 장 나란히 틔운 담장 그늘에서 오늘
어머니의 하늘 올려다본다
♧ 아버지
삐딱한 마음과 너덜너덜해진 마음마저 다 받아주는
늙은 의자
♧ 어머니
어머니
이승 밧줄 놓을 때
힘없이 눈 한 번 뜬 것은
그냥 뜬 눈이 아니라 하네
그 눈꺼풀 천근만근 무겁다고
염을 마친 염장이 침묵처럼 말하였네
자식 한 번 더 보려고
온 힘, 다해 눈꺼풀 밀어 올린 거였네
어머니
떠난 후 알았네
* 이윤승 시집 '눈가에 자주 손이 갔다'(문학의 전당,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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