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와 치자꽃

김창집 2017. 7. 18. 12:37



방청석 - 하종오

 

국회 방청석에

한 번도 앉아보지 못했지만

대통령 탄핵 가결하던 날

국회에는 방청석이

국회의원석보다 위치가 높다는 걸

새삼 알았다

 

헌법재판소 방청석에

한 번도 앉아보지 못했지만

대통령 탄핵 인용하던 날

헌법재판소에는 방청석이

재판관석보다 숫자가 많다는 걸

새삼 알았다

   

 

 

청과물 교회 - 허유미

 

삼만 원 들고 순례길을 간다

꽃들은 쇼윈도에 갇혀

계절 없는 망연한 인도(人道)

형형색색 에덴의 동산 솟은 청과물 가게

아저씨가 제철을 팔고 있다

오천 원짜리는 작고 만 원짜리가 좋아요

뜨거운 태양보다 먼저 나온

하우스 수박과 참외가

제철 과일 팝니다 차양막 아래

주님처럼 묶여

도심 너머 노지 이제 막 착상된 노복들을 바라본다

이달 아니면 못 먹는다는 성경 같은 말씀에 세례 받고

과즙이 줄줄 흐르는 찬양 봉지에 담아 고이 집으로 왔더니

대문엔 하눌타리 넝쿨 뻗어 뱀이 기어 다니고

하이섀시 창에는 매미들이 달라붙어 울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로 흐르는 도랑 옆 푸른 이끼 위

벤치에 앉은 할머니가 가위로 손톱을 깎다

얼음 띄운 설탕물 마시고

어린 나를 이끌고 무성한 녹음을 가르며 걸어간다

   

 

 

구름 박물관 - 현택훈

 

뜬구름 잡는 소리를 좋아해요

오늘은 적란운을 유심히 바라봤죠

어제는 친구의 이야기를 맛보았고요

친구가 흘러간 곳으로

나도 따라 흘러갈까요

하지만 그곳에 꼭 한 번 앉아보고 싶은 방석이나

사다리로 만든 의자가 있을 리 만무하죠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정류장, 가을의 호프집

때론 구름이 당신 눈 밑까지 내려와

나는 그 젖은 구름 위에서 낮잠을 자요

그것은 슬픈 꿈이죠

가장 슬픈 꿈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꿈이에요

나는 오늘도 구름 박물관에서 반나절

떠다녔네요

사랑은 빈 선물용 박스처럼

구석진 하늘 귀퉁이에 놓여 있어요

하지만 어떡해요

이 지구도 구름처럼 떠 있잖아요

내가 붙잡은 것들이 가방에 가득하고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두둥실 떠올라

다른 사람들의 지친 눈총을 받아요

그러니까 우리

허무맹랑한

사랑을 해요

 

---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

     

 

각재기국 - 김영란

 

줄 서 먹는다는

뽕이네 각재기국

비린 듯 얼큰한 바다

된장 한 술 풀어놓고

어진 손

어머니처럼

푸성귀 잘라놓고

 

퍼주고도 모자라

자꾸만 내어주는

등 푸른 제주바다

그리움에 출렁여

모처럼

낮술 한 잔에

푸근하게 편 하늘

   

 

 

만원 버스 - 오영호

 

하귀로 가는 버스와 함덕으로 가는 버스가

시청 사거리에서 만나자 갑자기 속도를 확 줄이더니

김 기사 창 열고 던지는 말

 

고 기사, * 들어싱게

빙색이 웃는 고 기사

 

---

*: 멸치

   

 

 

사월의 노래 - 이애자

 

가지 끝 걸어놓은 바람결에 귀를 대면

 

~~ 잡음 속에 슬픈 가락이 꺾여나가네

 

그렇게 제주의 사월은 몰래 듣는 것이었네

    

 

 

광양에서 - 조한일

 

믿나 봐라

믿나 봐라

 

아무리 우긴대도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란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말,

 

과양해봐

과아양

   

 

 

바늘엉겅퀴 - 홍경희

 

사람 나이

아슬아슬

숨길이 놓여 있나

 

마음 베인

말에 엉겨

과호흡이 찾아온 밤

 

울음을

여미지 못해

가시 세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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