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가에서 - 김석규
적막강산 대낮을 뻐꾸기 소리만 타오른다
물꼬를 넘는 물소리 끊어진 고래실논
잡풀들만 서로 뒤엉키어 머리끄덩이를 뜯고
인적이 하나 없는 고샅엔 하르르 바람이 인다.
하눌타리 덩굴이 빈집에 가득 뻗쳤으니
퇴락한 처마 그늘은 허물어진 담장을 넘고
내려앉은 방구들에 쥐며느리가 기어간다.
♧ 마을 하나가 - 김석규
마을 하나가 잔잔한 슬픔으로 걸린다.
인기척 내지 않는 나이의 노인네만 나앉아
멀리 숲정이 일렁이는 풍뢰를 듣는 대낮
개망초꽃 하얗게 가고 있는 묵정밭에
새끼를 데리고 고라니가 다녀가면
이내 멧돼지가 와서 파헤치고
가지고 갈 것도 그렇다고 두고 갈 것도 없는
마을 하나가 잔잔한 슬픔으로 걸린다.
♧ 네미
불끈 뱉는 육두문자는 서민들의 시이다.
어데가 시원한지 모두가 껄껄 웃는다.
♧ 여름 일기
텃밭의 키 넘게 자란 옥수수가 설겅거렸다.
애동호박도 감자도 매운 풋고추도 썰어놓고
수제비 먹는 저녁에 마당에서 비가 내린다.
호박잎에 듣는 빗소리 헛간 지붕을 기어가고
울타리 너머로는 반딧불이 떼로 날아다녔다.
♧ 애모
오늘 저녁은 무슨 저녁이기에
동남쪽에 덩그렇게 오른 달이 이리도 밝은가
보리밭에 벌레소리 이슬에 젖고
누구인가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이
목을 꺾어 돌아앉은 어디쯤을
하얀 상여는 언덕을 넘어서 가고
새들이 노래하는 따뜻한 세상의
꽃 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
여기에다 남겨두고 하늘끝 홀로 가신 님
♧ 미립
옥을 갈고 닦는 데는 타산의 돌이면 된다.
꼬부라진 나무라도 소를 갖다 맬 수 있고
장작을 쪼갤 때는 결을 따르는 것이 정도다.
♧ 즐거운 가난
빈손으로 살아가면 사는 것도 가볍다
햇살 소색거리는 양지녘에 나앉아
서캐훑이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 파장
어둠을 토닥거리며 날고 있는 불티
목로에선 술꾼 몇 아직도 노닥이고
펄펄 끓는 선지국솥에 오르는 김
전대를 풀어 꼬깃꼬깃한 돈을 펴는
칼바람 몸속을 파고드는 가게 모퉁이
이문 하나 남기는 것 없이
떠리미하고 일어선 좌판 고깃비늘
시린 별빛 아래 푸들거리며 흩어지는
섣달그믐께 썰물져 나간 파장머리
* '우리詩' 2017년 7월호 '신작소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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