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강하 시집 '붉은 첼로'의 시들

김창집 2017. 7. 15. 08:15


시인의 말

 

는 존재의 무한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무한의 힘은 극히 자유롭다

세속적인 계급을 떠나, 오로지

맑은 영혼이 빚어내는 정직한 고독이다

 

낯선 설렘처럼

가도 가도 끝없는 세계다

소리와 향기, , 감촉, 햇빛, 바람,

어둠이 있어 소통되는

그 아득한 깊이를 우리는 날마다 탐욕한다

어디에 있든

언제든 오랫동안 침묵도 상관없다.

 

2014년 초겨울 이강하

   

 

붉은 첼로 

 

어둠 속 빛을 겨냥한 소리는 신중하다

빛을 품은 축축한 것들이 구름 속에서 발화되는 것처럼

구름이 태양을 알아가는 깨달음의 현

 

둥근 턱을 바랬으나

뾰쪽한 턱이 더 많았던 시간

그러나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나뭇가지 슬픔도 감수한

나이테 속 무중력의 악보들,

덜 여문 관계까지 눈치 챈 이 빗소리를 무엇이라 불러야하나

 

뼈를 깎는 논쟁이 있었기에

온 세계가 모여 만찬에 들 수 있는 것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악기로 부산떠는 거지

지난 잘못을 이제는 다신 거론 말자

정작 상처 입은 사람은 왜 말이 없는지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 척, 현재의 실상에 박수를 치는 거지

 

돌아서는 내가 두렵다

내일은 언제나 다이어트, 뚱뚱하게 내리꽂는 비의 변곡점에

눈을 떼지 못한 너도 두렵다

야누스를 복면한 빗방울들이

어느 복지관 굴뚝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저녁

   

 

 

첫사랑

 

  놀라운 미()ballroom이다. 세노테*의 햇살처럼 물길이 만들어낸 희귀한 석순처럼, 세월이 지나도 빛을 낸다. 쉼 없이 서로를 에메랄드빛으로 학습한 노래, 황홀한 물의 결집이다. 어떤 일이든 함께 공감할 때 서로의 존재는 믿음을 먹고 더 높이 성장한다. 간혹 마음의 창문에 구멍이 뚫려 검은 바람이 들기도 하지. 그러나 이는 내 생각이 네 생각이기 전에 응고된 고독일 뿐, 완전한 함몰은 아니다.

 

  이별한 첫사랑은 잊을만하면 되살아난다. 푸른 운명의 끈, 이보다 긴장된 역사는 없다. 나이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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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테 : 낮은 편평한 석회암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함몰 구멍에 지하수가 모인 천연 우물.

     

 

장미의 시간


  반쯤 핀 꽃봉오리, 여러 겹의 꿈을 앓는

  그 얇고 붉은 입술의 방언을 나는 가시로 읽는다

 

  오월의 난투극 같은 철조망은 고통으로부터 버림받은 유혹이거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질투의 건강한 골격이다 변명이 많아질수록 점점 분명해지는 출구 없는 시간의 광장, 몇 가지 상식만으로 삶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어 마지막 꽃이 피기 전에 처음 꽃을 버려야 했고 울음이 터지는 가시의 감정을 가만가만 주워 담아야 원인의 매듭을 풀 수 있었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덩굴장미

 

  나는 지금 대륙이 투하한 감마리놀렌산에 감염됐어요 붉은 광장이 푸른 물방울들이 검은 출구를 강타해요 당신들은 나와 함께 영원한 자유를 꿈꿀 거예요 작은 물고기들이 희귀한 나비 떼가 나를 통과해요 빨강과 파랑이 교화敎化해요 절정의 순간이 아침이 될 때까지

   


책의 온도

 

귀뚜라미 울음 먹고 자란 닥나무 한 그루

한 권의 유품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협곡을 오르내렸을까

유명幽明을 달리한다는 것은 다시 못 부를 이름을 활자화한다는 것

다시 안 잊힐 역사를 농축시켜

빨갛게 타오르는 열병이다 먼 훗날

 

사람들을 놀라게 할 세상을 평준화하겠다는 불우한 힐책

제 살 떼어 주는 붉은 자전을 그 누가 알겠는가

반항하고 싶어도 속내 감춘 구슬픈 울음들이

계곡 속에 처연하게 섞이는 밤,

얽히고설켜 서로의 단점을 염려한다

 

문맥 속에 갇혀 있던 자유의 본능은

한 생을 다시 펼친 시간의 갈피에 죽은 영혼들 일대기를 그려내기도 한다

오래오래 닥나무를 분석해

주변 온도를 맞추기 시작한 귀뚜라미 한 마리

4초 동안 서른다섯 번 아랫도리를 벗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알몸을 벗는

 

시국의 진실을 익히 파악한 안개의 혈맥들

붉은 두족류들과 한판 엎드려 차디찬 생의 한기를 벗어날 심사다

동경하는 힘이 같아질 땐 그쪽으로만 뜨거워질 것이다

내 귓가에 다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 한 줄 끊길 듯 들려오는

산조 가야금 첫 소절이   

 

 

천이遷移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신의 피는 계속 끓는다

새소리, 산림의 비율이 가끔

결박의 온도에서 벗어나듯

돛을 단 씨앗은 바다 기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일정한 지역에서 탈출한

번식의 자유는 언제나 당돌하다

누군가 선택한 바람이 계곡으로 흩어질 땐

당신의 심장은 어느 순간 산마루에 올라 활짝 웃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주 가혹히

 

당신과 나 사이는 세월의 근엄한 거울

나이테처럼 깊고 강인하다

기적이 아니라 당연 예측이 가능한

누구를 위한 저항인가

 

지친 그늘이 태양을 제 몸에 세차게 문지르면

아주 잠깐 누군가는 열반에 든다 그래서

시간의 간격은 오묘한 미래,

 

날마다 질주하는 시간의 번식

가슴이 뛴다 계곡의 꽃향기가 빗장을 연다

당신과 나는 돌고 도는 추륜(推輪),

수직과 곡선을 사랑하는 숲의 눈물이다  



盲人맹인

 

깜깜하지 않아, 나는 항상 바깥이었으니

 

내 바깥은 신비롭고 화창해

기차를 타고 가는 기다란 호수 같아

멀리 여행을 가고 싶어, 하고 노래 부르면

물결을 타고 오르는 싱싱한 배 한 척

그러나 완벽한 항해란 쉽지 않아

공연을 실수 없이 마치는 것처럼

목덜미를 스치는 그 무엇도 놓쳐선 안 돼

 

허공의 길을 더듬어 몸을 휘는 나무들

울퉁불퉁 걸음은 매초 근엄하고 신중하지

나는 슬픔을 모르는 볼록한 잎눈

어느 지팡이 미래를 연구하는 점자가 되지

어둠으로 이어지는 저녁의 길 끝, 저쪽을

훤히 열어놓고 나는 밤에도 걷지

 

두렵지 않아,

내 몸속에는 거대한 지도가 움트고 있으니



                  * 이강하 시집 '붉은 첼로'(시와 세계 시인선 014, 2014)에서

                        * 사진 : 7월의 단풍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