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문학』2017 겨울호(통권28호)는
‘초대시’로
최문자 시인의 시 8편을 실었다.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1982년 현대문학 등단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울음소리 작아지다’, ‘나무고아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사과 사이사이 시’
‘파의 목소리’ 등이 있다.
♧ 냄새 2
-풀
늘 풀내 나는 향수를 쓴다.
풀도 꽃만큼 자란다.
하고 싶은 말도 꽃만큼 자란다.
꽃에 눌려 언제나 쉬는 풀의 말
꽃 속에서 재가 되는 풀의 말
꽃만큼 꽃에게 갈 수 없어서
가다가 그치고 가다가 마는
아예 신발가지 벗어 감춘 꽃 옆에 서 있는 풀의 말.
꽃을 지나 풀을 헤친다.
내 몸 어느 풀숲에서 풀벌레가 요란하게 울었다.
어느새 풀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
♧ 뿌리
깊은 곳엔 언제나 흙이 있었다.
움푹움푹 깊어지면 흙이 보였다.
조금도 안 쓴 흙에 닿을 수만 있다면,
닿을 수만 있다면……그래서 뿌리가 생겼다.
땅 밖에서 죽어라 하고 머리끄덩이 잡히는 줄도 모르고
그런 마음으로 커갔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들은
언제나 흙 속에 있었다.
선한 농부만이 땅을 깊숙이 갈아엎고
그것만을 찾아냈다.
감추려드는 끈질기게 비밀스러운 한 삶이 끝나면
저렇게 흙 속에 제 머리칼을 누이고
무수하게 낸 손톱자국까지도 가지고 간다.
망자가 활짝 벌린 하늘을 마지막 보는 사이
서서히 대낮이 어두워졌다.
파묻히는 고통에서 내년 봄쯤 뿌리 하나 생기리라.
한 번도 안 쓴 흙에 닿을 수만 있다면,
닿을 수만 있다면.
나도 이 불결한 시간을 놓고 싶다.
저 깊은 흙을 당기는 깨끗한 뿌리 하나 두고 싶다.
♧ 마지막 잎새
첫눈 오는 날
독한 잎 하나를 보았다
끝까지 초록을 옹쳐 매고
설자리 없어
가꾸로 매달려 흔들리는 잎
퍼뜩,
물들거나 마르지 못하는 몸
몸속엔 분명 색깔이 있다.
손을 잡기만 해도 흠뻑 물드는
무서운 물감
아버지는 어머니를 쉽게 물들였고
어머니는 헐겁게 물들어주면서
나중엔 어떤 색깔이랄 수도 없이
그런 비슷비슷한 혼융의 색깔이 자라던
그 화평의 나무 아래서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게
맘껏 색칠놀이를 하였다
유년과는 늘 어긋나던 물감의 세상
삼십 년을 살고도 펴보면 그 빛깔 그대로냐고
그가 화낼 적마다
어금니 깨물고 물들자 작정해도
저렇게 독하게 옹쳐 맨
내 안의 잎 하나
그 마르지 않는 힘을
나, 어떻게 이기나?
비바람 칠 때마다
창문을 열어본다.
거꾸로 매달린 희망
마지막 저 잎새.
죽음을 얼마 앞두고도
끝내 초록을 떠나본 적 없는
믿을 수 없는 독한 잎 하나
바람이 잘 때까지
나는 잠들 수 없다.
♧ 봄날
오늘 나무가 수상했다
하루 종일 가슴이 불룩했다
우연히 깃들었다가 날아가지 못한 바람을 붙잡고,
우드득우드득 이빨을 갈다가 가슴을 열었다
가슴에서 튀어나온 말 한마디 같은 서툰 꽃 한 송이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길 어귀
늘어진 꽃가지를 확 젖히니
길바닥에 봄이 벌렁 나자빠져 있었다
이제껏 어디서 무슨 짓을 하다 왔는지 벌게진 꽃가지 불두덩 사이로
아슬아슬한 곳만 가린 고백들이
여기저기 불룩했다
며칠은 더 지나야 이해될 꽃의 말
만개될 꽃의 문장
아직은 더듬더듬 꽃 몇 송이 내놓고
가슴만 불룩하다
오늘 사람들도 수상했다
하루가 불룩하니 수상쩍었다
♧ 진달래 꽃
괜찮아, 괜찮아 뒷산에 불 지른 것 불이 나를 지나 내 푸른 노트 다 태워 버린 것 가장 찬란한 사랑은 언제나 다 타고 난 가루에서 빛나는 것 한 번의 뜨거움으로 죽도록 꽃은 가루가 되겠지 한 사나흘 비 뿌리는 동안 꽃이 물이 되는 거 그 물이 불을 끄고 돌아서서 다시 푸른 노트가 되는 것 괜찮아, 괜찮아 뒷산에 불 지른 것 불 지르고 돌아서서 진분홍 물이 되는 거 알 수 없는 그 고단했던 사랑
꽃잎 날리는 모든 이별
괜찮아
♧ 식목일
식목일, 나는 함백탄광 뒷자락 두위봉으로 주목나무를 심으러 갔어요 나무를 심으러 갔다가 나를 심었어요 주목나무를 들고 갱도 위를 지나갔어요 내 몸 아래로 탄갱이 흘러가요 방제 갱이 삐죽 나와 있어도 돌아서 갔어요 나는 함께 멸망하고픈 나무들이 2억 년이나 쓰러져 있던 자리를 팠어요 2억 년을 캐내던 광부처럼 구덩이를 파고 주목나무 뿌리를 묻었어요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 죽어서도 옆구리가 빛나는 지리산 고사목이 목마른 주목나무인 걸 알았어요
나무가 살아보려고 물을 마시는 시간
내가 레몬주스를 마시는 시간
모든 기차와 헤어지고 하나만 남은 함백역이 나를 바라봐요
나만 보면서 선량하게 서 있어요
오늘은 식목일 좋은 날이에요
사갱 구덩이가 나를 안아줘요
여러 번 쓰러졌던 나를 가만히 심어줘요
2억 년 후에 석탄으로 깨어날 얼굴을 묻어줘요
누군가 어둠 속에 까맣게 매장되어 있는 동안
두위봉은 꽃 천지예요
* 『산림문학』2017 겨울호(통권28호)에서
사진 : 12월에도 푸름을 잃지 않은 서귀포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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