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종형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김창집 2018. 1. 14. 10:47



시인의 말

 

가만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일이다.

늦깎이로 를 만난 일

가 맺어준 사람들을 만난 일

가 곁에 있어서

그들과 함께여서 참 다행이다

 

가끔 술자리에서 독백처럼 했던 말이지만

를 만나지 않았다면

허기지고 외로운 시간들

생의 변곡점을 지나는 계절들을 잘 견뎌낼 수 있었을까

 

지나온 시간들이 누추해지지 않아서

태어나고 살아온 내력과도 마침내 화해할 수 있어서

 

                                     2017년 늦가을 아라동에서

   

 

 

山田*

 

깨진 솥 하나 있었네

누군가는 버렸다고 하고, 누군가는

떠나며 남겨두었다고 하네

 

어느 겨울

솥을 가득 채운 눈()을 보았네, 문득

갓 지은 보리밥이 수북한 외할머니 부엌의 저녁이 떠올랐네

山田의 깨진 솥은, 그해

뜨거운 김을 몇 번 내뿜었을까

달그락거리며 솥바닥을 긁던 숟가락은 몇이었을까

 

겨울이 수십 번 다녀가고

수천 번 눈이 내리고, 얼고, 녹아 흘렀어도

그날의 허기가 가시지 않았네

 

아직 식지 않았네

 

---

* 山田 : 제주43항쟁 당시 무장대사령관 이덕구가 지휘하던 무장대 최후의 은거지. ‘이덕구 산전이라고도 한다.



통점

 

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묵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山田 가는 길

 

아래턱이 떨어져 나간 노루의 두개골을 주웠다

살도 뼈도 다 녹아 사라지고

두 갈래 뿔만 남은 얼굴이다

 

젊은 목숨이었을 게다

잘생긴 사내였을 게다

장딴지의 팽팽한 근육으로

이 숲을 바람처럼 날아다녔을 게다

 

그 겨울, 이 골짜기에 깃든 목숨들이 다만

젊은 노루뿐이었으랴

 

무자년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山田 가는 길

배낭 위에 고이 얹힌 뿔에 다시

뜨거운 피가 돌고 있다

   

 

 

자화상

   -동짓달 스무사흗날 밤에 관하여

 

달빛도 없었다는데

 

만삭의 내 어머니

철모르는 뱃속 발길질에

눈물짓기 딱 좋은 어둠이었다는데

 

성밖 오름 정수리 달구던 봉홧불 사그라지고

대숲에 성긴 바람도

숨죽이던 겨울 근처

섬은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는데

어머니 배만

봉긋 솟아 있었다는데

 

뜨끈한 구들장 온기 위로

내가 툭 떨어져 탯줄 자르기 전

외할아버지는 곡괭이 들고

어머니의 작은 방

그 방바닥을 다 파헤쳤다는데

 

육군 대위였다는 육지것 내 아버지

그 씨가 미워서였다는데

배롱꽃처럼 고운

딸을 시집보내 얻은 세 칸 초가집의 평온

그게 부끄러워서였다는데

산에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내들이 많았다는데

 

저야 알 수 없지요

가을 억새 빈 대궁

깃발로 펄럭이고 죽창 시퍼렇던 밤

멀리 한라산기슭

초가집 활활 불타는 모습이 꼭

대보름 달집 태우는 듯했다는 시절

저야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머니 눈물짓기 딱 좋았던

동짓달 스무사흗날 밤

갓난아기는 울지 않았다는데

저야 모르는 일이지요

 

다만, 동짓달 까맣게 사위던 밤이었다는데

   

 

 

검은 돌에 새겨진 , 혹은

 

살아 있었다면

큰형님뻘이었을

큰누님뻘이었을

아무개의 , 혹은 라고만 새겨진 위패 앞에서

 

겨울바람에 떨어져 누운

동백의 흰 눈동자를 떠올렸습니다

 

뼈와 살이 채 자라기도 전에

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스러져

까마귀 모른 제삿날에도

술 한 잔 받아보지 못하며

애써 잊혀진 목숨들

 

거친오름의 그림자를 밀어낸 양지바른 터에

복수초 노란 빛깔보다 선연한

이름씨 하나씩 꼭꼭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이 섬에 피는 꽃과 바람들

곶자왈 숨골로 스미는 비와 태풍들

저 이름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

아비보다 더 나이 든 사내가 되었습니다

 

유품이라고 남겨진

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

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

한없이 가엽고 가벼우나

마침내 사내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와

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순례의 끝

죽음의 그늘을 벗기는

꽃이 피고 봄이 오고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간절한 노래는 다시 시작되나

나는 아직도 당신과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4

 

아궁이에 불씨 지펴본 지 오래인 채

겨울은 지나갔다

죽은 이름들은 애써 잊어야 했고

눈물 흘리는 일조차 위험하였다

 

아이들은 제사상에 술 올리는 법도를 먼저 배우며

어른이 되어갔다

뼛골 시린 봄추위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백은 누명보다 더 붉게 피었다 졌지만

불온한 색이었으므로

눈길 주는 이 없었고

공회당 옆 팽나무는 가끔

새순 밀어 올리는 일조차

잊어버리는 눈치였다

     

 

봄바다

 

붉은 동백꽃만 보면 멀미하듯

제주 사람들에겐 4월이면 도지는 병이 있지

시원하게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생손 앓듯 속으로만 감추고 삭혀온 통증이 있어

 

그날 이후

다시 묵직한 슬픔 하나 심장에 얹혀

먹는 둥 마는 둥

때를 놓친 한술의 밥이 자꾸 체하는 거라

시간이 그리 흘렀어도

깊고 푸르고, 오늘처럼 맑은 물빛 없으니

한걸음에 내달려 보러 오라고 너에게 기별하던 봄바다만 보면

요즘은 별나게 가슴 쿵쿵 뛰고

숨이 턱턱 막혀올 때가 있는 거라

세상에 가장큰 무덤인 듯

바라보는 것만으로 죄짓는 기분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저 바다 여는 길을 낼 수만 있다면

어미들은 기꺼이 열 개의 손톱을 공양했을 거라

 

백 년 넘은 산지등대 가는 오르막길

제주항이 내려다보이는 그쯤에 멈춰 서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본다네

누가 애써 씨 뿌리지 않았어도

비탈진 언덕 곳곳에 돌아온 봄꽃, 노란유채꽃

 

아이들아, 나오너라

저 꽃무더기 서너 줌 따다가 한 솥 가득 꽃밥이나 지어 먹게

도란도란 둘러앉은 저녁 밥상 받아놓고

부웅부웅 안개길 헤쳐 돌아오는

무적霧笛 소리나 같이 듣게



                   * 이종형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삶창시선 5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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