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을 메시지 - 박병대
비 그치니 하늘이 옷을 벗고 있다
소리 없이 날아가는 두루미처럼
밝고 어두운 구름이 어우렁더우렁 하늘을 열며
보여주는 형상은 암호처럼 전해주는 메시지 같다
파란 하늘에 노을 먹은 구름 사이로
토막져 있는 창槍 같은 구름이 하얗다
노을 지워지는 구름이 검게 물들어 간다
하늘도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꿈꾸러 가는 시간
어둠에서는 어두운 구름이 보이지 않는다
희미하게 보이는 구름처럼 흘러가는 삶
현재는 언제나 가고 없는 노을 같다
다시 피는 꽃처럼
다시 물드는 노을의 메시지를 기다리며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어둠이 되어야겠다.
♧ 달력 - 김종호
한마디
말도 않는
숫처녀를 불러 놓고
날마다
중얼거리며
그녀 말을 짐작한다.
오늘은
결혼기념일
장미꽃을 사야지.
♧ 탈출 - 정유광
복도 끝을 바라보다가 불의 항문을 보았다
배설된 불빛
소화되지 않은 빛은 응달로,
씹어서 삼키지 못한 울음이 토사로 뿌려진다
굴절된 빛이 아름다운 것을,
곧게 걸어간 빛의 소실점이 송곳처럼 찌른다
삶을 투시하니 그냥 점
내가 빛인 적 없으므로 그림자도
내 그림자는 아니었을 것
복도에서 본 불의 항문
빛이나 사람이나 죽으면 괄약근이 풀어진다
감옥 같은 똥배에서 살아온 내게 나는
두엄 냄새
소실점을 깨면 내가 빛이 될까
사방 곳곳 날아갈 수 있으려나.
♧ 용접 - 조봉익
닭장을 짓는 중
저쪽 모과나무에
보이지 않던 새 가지가 눈에 띈다고
인사차 들른 늙은 조카부부가 말을 건넨다
계절은 언제 저런 용접술을 배웠을까
지난여름 유난히 별빛들 튀고
한낮 파란 이파리들 사이사이 반짝이는
빛살 파편들 분주했다
모든 나무들 갈라져 그늘을 이룬 곳마다
이어붙인 흔적 뚜렷하다
그러고 보니
별빛 파파파팍
용접하던 소리 들었던 것도 같다며
덩달아 바다를 건넌 신부와 가까워진다는 신혼부부
구불구불한 언어가 함께 붙는다고 한다
왜 밤이면
먼 곳의 하늘과 땅 사이가 붙어버리는지 이제야 알겠다
새로 가지 하나 만들기 위해 반짝이는 별빛
피자마자 시드는 순간의 정원에
별들 밤새우고 있다
♧ 이방인 시편 - 장성호
-녹턴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달빛 아래 옷깃을 여민 한 이방인이 나무 벤치에 기대어 서 있다
가파른 절벽 위 걷는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뜬다
여윈 뺨 위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파르르 떠는 그녀의 입술
그의 가슴속에 뜨겁게 떠오른다
가슴이 막 뛴다
숨이 점점 막힌다
슬픈 그녀의 얼굴
그의 가슴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다가
이내 희미하게 사라진다
눈물이 또 난다
달빛도 점점 희미해진다
숲 속에 초연하게 핀 연보랏빛 쑥부쟁이 꽃잎이 흩날린다
이은미가 애타게 부르는 노래 ‘녹틴’
선율에 그의 목이 멘다
내 사랑 그대
이제 나를 떠나간다
♧ 약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242
먹어도 치료가 되지 않는 약을
아침 저녁으로 먹입니다.
알약을 못 삼키니
유발에 갈아서 복용시킨 지 벌써 몇 년째,
오늘도 아침에 다섯 알
저녁에 여섯 알을 깨고 갈아 먹입니다.
내일은 매화꽃이 피겠지 하며
억지로 먹이니 어디 꽃이 피겠습니까?
약은 약이고
꽃은 꽃입니다.
♧ 희망에게 - 정공량
아득함에 지쳐 노래 부르고 싶을 때
너를 만나리라
사랑하다 지쳐 쓰러져 울 때도
너를 만나리라
멀리서 그러나 더욱 가까운 곳에서
물리칠 수 없는 고통과 이웃할 때
내 설움을 비에 적시고 싶을 때
그때 너를 만나리라
만나서 네가 건네는 한마디 말에
나는 다시 일어서서 내일로 달려가리라
지친 내 몸, 내 마음 세우며
바람처럼 흘러 흘러서 가리라
♧ 라다크 가는 길 - 나병춘
강가에 길이 따라갑니다
그러다 뚝, 끊겼습니다
간밤에 폭우로
바위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굴러 내린 바윗돌이 떠억,
부처님처럼 좌정하였습니다
탁류는 제 본성대로 콸콸
지청구 쏟아내며 갑니다
어쩌는 수 없군요
기다릴 밖에,
옆에서 해당화들이
철없이 깔깔거리고 있어요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2018년 1월호(통권355호)에서
* 사진 : 요즘 계속 빛을 발하고 있는 흰애기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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