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모래사막을 빠져나간
한 올의 은빛 낙타를 찾기 위해
밤의 지면을 하얗게 긁던 지난날들
골똘한 이슬이 맺힌
시인의 창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언어의 유희가 아닌
가슴으로 공명을 울리는
목숨의 불티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발자국을 뒤돌아보니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부끄러운 첫 시집을 낸다
2017년 가을 김만복
♧ 그림자 지우기
도심의 고층 숲에 드리워진 그림자
그 무늬와 발자국을 따라
태생을 기억하는 꽃들은
언제나 짐승 냄새를 풍긴다
어둠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더 지독한 허기를 느끼며
또 다른 씨앗을 잉태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바람의 유전자를 닮은 대물림으로
더욱 단단해진 족속들의 광기
파랑의 그림자로 위태롭게 몰아간다
햇살 따라 하늘로 뿌리 뻗은 물푸레나무
도시의 사막 위로
먼지도 없이 흘러내리고
여백으로 밀려난 풀꽃들은
소리 없이 피었다 진다
당신의 온기에 부끄러운 밤
그림자를 지우는 것은
한 생애의 모든 강물을 비우는 일
문 밖에서 나는
무채색의 마음 한 가닥 내려놓는다
♧ 나비 시인
허공 한 장 넘겨
사뿐
오월 행간에 날아올라
봄을 속독하는 풍류객인가
꽃술의 유혹에 빠져
화분 입술에 바르고
옥문을 탐닉하는 호색가인가
어쩌면 숲의 중력에서
탈옥을 꿈꾸는 아나키스트
카멜레온과 사마귀의 속성을 응시하는
냉철한 시니스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량한 자유로
사유와 본능을 넘나들며
언어의 직공을 꿈꾸는 나비는
지금 목하 몰입중이다
♧ 나목(裸木)
마지막 남은 한 꺼풀 육신마저
훌훌 벗어버리고
저려오는 냇물에 몸을 담근 채
깊어가는 고행의 나무들
숨죽이는 고요 속에 홀로 깨어나
얼어붙은 관다발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이성
무엇을 남기며 무엇을 버리려고
저마다의 가슴에 탑을 쌓는가
아직도 얼마를 더 비워야
화엄의 깊이를 볼 수 있나
반야의 겨울 들판
야윈 육신에 다비의 불을 지피면
얼음 속에서 촘촘히 눈 뜨는 뼈 하나
밤새 휘파람 소리를 낸다
♧ 새의 울음이 머무는 풍경
지도에도 없는 몇 조각의 분할된 조망권을 따라
문명의 군락지에 마구 휘둘린
거대한 공룡들이 점령한 가파른 스카이라인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빈 소라껍데기에 세든 게고둥처럼
개진개진 기어드는 나무늘보 한 마리
겨울이 서식하는 텅 빈 집은 아직 낯설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사람들은
몇 겹의 녹슨 담장 밖에 펼쳐진
경도와 위도만큼이나 넓은
자연의 시집을 탐독하지는 못한다
기우뚱 기울어진 첨탑의 고가선 너머
공명을 울리는 웅숭깊은 새의 울음 하나
풋풋한 바람의 획을 그으며 고즈넉하다
바람과 햇살이 수주한
달빛에 출렁이는 성긴 집 한 그루
지붕도 서까래도 없이 생의 안감을 대고
비바람이 짚어주는 눈금을 따라가며
소슬하게 흔들리는 집을 짓는다
풍경 소리 잔잔한 미소로 환히 피어나
사막을 걸어온 지친 영혼들
가슴을 열고 이슬처럼 내려와 쉬었다 가는
사방이 트인 벽이 없는 공중에
어둠의 잔가지들을 보듬고 하늘로 층층이 쌓아
높은 곳이 가장 낮은 곳이 되는 곳
하늬바람 불어 유유히 자적하는 저 풍경들
푸른 울음이 자욱한 공중은
이제 새들의 차지다
♧ 목련
초록 바람에 실려 온 꽃물 편지
초조初潮의 긴 기다림과 설렘으로
수줍어 얼굴 붉히다 돌아서는
가녀린 너의 모습
하늘하늘 봄볕을 밟고 와
하얀 블라우스 속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간장 종지 같은 젖가슴 위로
사뿐사뿐 나비 한 마리씩 날아오르고
싱긋한 바람은 살랑살랑 눈웃음친다
화선지 고운 살결로
여백의 잔잔한 미소 지으며
행간에 진동하는 성숙한 여인의 체취
흰 구름 내려와 기웃거리는
어느 봄날 오후
유혹에 빠져버린 목련 빛 나의 사랑은
하롱하롱 지고 있다
♧ 바람꽃
세상천지
봄의 유혹에 곁눈질하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리
촉촉한 꽃잎 입술에 젖지 않을
바람이 어디 있으리
초록 가슴 열고
봄 뺨이 붉게 달아오른다
간실간실 미풍에
꽃술이 순결처럼 떨리더니
달빛 가랑이가 흥건히 젖는다
겨드랑이에 사타구니에
봉두난발
온통 당신이 핀다
홀아비바람꽃 바람에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 그리움
진한 수채화의 풍경으로
눈부신 그녀의 투명한 속살로
수줍어 얼굴 붉히다
소리 없이 다가온 계절
기차바퀴에 깔리는 하얀 이슬
어디선가 포롱포롱 우는 새소리
나는 문득 그대와 함께 떠나자고 했었다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계절의 창 너머엔
어느새 그리움으로
파아랗게 채색되어 간다
♧ 바다로 간 낙타
화선지 위를 나는 홍여새 한 마리
여백에 점점이 박힌 발자국을 따라가면
어느덧 늦은 오후의 햇살로 남아 도란거리는
파래 빛 대문을 두드리자
적막이 먼지도 없이 내려앉는다
꾸릴 것도 없는 짐을 부린 채 나는
모래톱에 밀려온 물결무늬 출항계를 뒤적인다
물때 따라 마실 간 주인 없는 빈방에
소금기 절은 앙상한 오후가 등뼈처럼 서있고
아직 아물지 않은 얼룩진 상처들이
돌가루 장판에 골목의 전단지처럼 붙어 있다
오래 잊혀졌던 그리운 얼굴들
누군가의 등짝을 토닥이던 바람
찰싹찰싹 볼을 비비며 머리맡을 더듬는 파도소리
실핏줄 선연한 젖가슴 속으로 기어드는 유년의 달빛
등피처럼 그을린 구들장 아랫목이 따스하다
썰물 이랑 깊어가는 바닷가 포도밭
거북손같이 굳어버린 각질들이 비릿하게
물비늘로 뚝뚝 떨어지고
희고도 푸르게 분골(粉骨)한 생
이제 막 노을빛으로 검붉게 물들고 있다
문득 뽑아든 책갈피엔
겨울동백 한 컷 시린 눈을 뜨고 나는
해무 자욱한 독거군도(獨巨群島) 방파제 끝에 홀로 서
수평선 자락 끌고 물때 따라 돌아오는
등 굽은 늙은 낙타를 생각한다
* 김만복 시집 '그림자 지우기'(서정시학 시인선 141.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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