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나무를 보라 - 조연환
저, 나무를 보라
태어난 자리에서 백년 천년을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지
뿌리에서 물을 긷고 잎들이 밥을 지어
가지 줄기 밥과 물을 부지런히 날라도
퇴역한 세포들이 뿌리와 줄기를 떠받지 않으면
나무는 설 수 없는 것을
산 세포와 죽은 세포가, 현역과 퇴역자가
한 몸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저, 나무를 보라
태어난 자리에서 백년 천년을
살아가는 모습을
♧ 풀꽃의 힘 - 지은경
들풀은 학연, 지연, 혈연이 없이도
세상 보는 눈길 촘촘하다
풀꽃 하나,
뿌리 없이 태어나 고향이 어디인지 모른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어디에든 싹을 틔우며
진흙밭에 빠지거나 가사덤불에 찢기기도 한다
누구, 풀꽃의 이름 석 자 몰라도
여기 시의 집에 뿌리내려
그리움과 기다림의 맺힘 풀어내며
핏빛 꽃송이를 피워내고 있다
♧ 안개 숲 - 이진옥
안개와 바람의 숙영지 숲으로 왔다
안개 갈기 휘날리는 숲
나무의 고요에 기대어
바람 소리 풀 소리에 귀 기울인다.
나뭇가지를 쥐고 놓지 못하는 새들이
허공에 울음을 건다
안개 속에서는 꿈을 꿀 수 없다고
날개를 퍼덕이며 고요를 밀어 낸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나뭇잎 밟고
걸어왔던 먼 길을 뒤돌아본다
나무의 언어는 긍정과 배려
괜찮다, 이제는 괜찮다고.
♧ 한겨울 복면강도 떼 - 이준섭
귀마개 쓰고,
마스크 쓰고,
겨울 모자 눌러쓰고
한겨울 등산길 올라오는 사람들
두 눈만 탱글탱글
살아 움직이는 빛이 산봉우릴 다그친다.
무엇을 훔치러 몰려올까
한 줄로 서서 쌕쌕거리며
한겨울 속 뭐 훔칠 게 있다고
다 벗은 나무들은 덜덜덜 떨고 있고
산토끼들도 동굴에서 덜덜덜 떨고 있고
나무들, 풀잎들도 실뿌리 톡톡 불거진 채 떨고 있는데
아, 이제야 알겠다
한겨울 복면강도들은
강추위 속 봄을
봄의 예쁜 꿈을
품고 가려 몰려오나 보다.
♧ 내비게이션의 눈 - 이옥천
내 길은 말을 아낀다
우주 들고 사는 이 때
흑암 헤맨 지 몇 해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긍긍의 멍에 무겁다
불은 꺼지고
힘 약해 헤칠 수 없어
신작로 길도 노심초사
활보할 수 없다
말해다오
혜안의 빛을 켜
골목 비춰 주려마
내 묻는 말엔 대답이 없다.
♧ 홍엽紅葉 - 윤준경
가까이 오지 마세요
거기까지만 계세요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화인 맞은 왼팔
타오를 듯
붉은 몸
다가가면 재가 될
당신이 나를 가두듯
내 안에
산을 가두어도 될까요?
♧ 꽃밭 - 유수진
마당엔 소나기 같은 짠내
동네 어귀의 그 집, 살짝만 밀었는데 삐걱거리며 열리는 대문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면 빈틈없이 뭔가를 심어놓은 마당
대문과 가까운 쪽 기둥에
햇볕에 바랜 신문지같이 붙어 있는 글씨
담배
계셔요,
계셔요,
계셔요,
마루에 걸터앉은 어둠보다 더 컴컴한 걸음
구부러진 등을 업고 방안으로 기다시피 들어가던
담뱃집 할머니
하늘 군데군데 피어있던 꽃구름
하나 둘 떼다가 곰방대에 쑤셔 넣고 불을 붙인다
깊게 몇 번을 들이마셔 빨아야 빠작빠작 타오르던 불꽃
구겨지고 펴기를 반복하느라
상추 한 포기 심을 자리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꽉꽉 들어찬 검버섯
누구도 들어서지 않던 그 꽃밭
♧ 늦가을 - 김내식
도토리
속에
벌레 한 마리 들어앉아 잘근잘근
몸과 영혼을 분리하여
왔던 곳 되돌리는
대자연의 임무
수행 중이고
인간은
욕심만 줍느라 꾸벅꾸벅
절을 한다
-『산림문학』2017년 겨울호(통권 2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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