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역류동인' 20주년 기념집과 봄꽃

김창집 2018. 3. 17. 12:23



아그배나무 그늘에서 - 홍성운

 

누가 불러 오셨나 아그배나무 그늘에

상처 받은 마음은 그냥 내려놓고

실핏줄 환히 보이는 연분홍 꽃으로

 

아침이면 이파리에 대롱대롱 이슬 달리듯

살다보면 그렁그렁 눈물이야 없을까만

그런 날 아그배나무는 자꾸 손짓한다

 

사랑과 미움이 버무려진 유월에

유혹일까 위무일까 휘파람새 절인 울음

그대가 내미는 그늘, 꽃등 하나 흔들린다

 

 

 

망운암 - 정성욱

 

노스님의 법랍처럼 곱게 늙은 산사에서

꿈 아닌데 꿈인 듯이 안개가 내리고 있다

하룻밤 낯선 곳에서 참을 청하는 그대.

 

기약 없이 보낸 편지 바람으로 돌아오고

속곳 푼 동백나무 수줍은 듯 웃고 있다.

내 귀를 맑게 틔우는 목어소리 범종소리.

 

내 미처 오십 생이 안개임을 몰랐었다.

사랑은 꿈이 되고 그리움은 무덤 되는 것을

, 깊이 깨닫는 순간 몸 비비는 까마귀 떼.

   

 

사막에 홀리다 - 신양란

 

  올 여름 사막엘 갔지. 진짜 사막이었어.

 

  미인의 젖가슴인 양, 다시 보면 엉덩이인 양, 둥글둥글 순한 선이 어깨인 양, 목덜미인 양, 아스라이 이어지는 그 능선 그 등성이를 과묵한 낙타들이 뚜벅뚜벅 걸어갔어. 세상이 무너진대도 무릎 꿇지 않을 그들. 느긋한 여름 해가 붉은 치맛자락 펼칠 즈음, 모래바람이 불었어, 사르락사르락 불었어. 그러자 사막은 간지럼을 못 견디고 허리를 배배 꼬며 이러저리 곰실댔지. 어둠에 젖은 사막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세상에, 바늘 꽂을 틈도 없이 온통 별들이 빽빽했어. 별들이 이룬 밀림을 난생 처음 구경했어.

 

  그때 나 사막에 홀렸어, 심장을 확 움키고 말았어.

   

 

 

금오도 비렁길 - 박현덕

 

가파른 해안 따라 비렁길을 걸어간다

허공을 잡으려다 수전증이 걸린 파도

나 잠시 금오열도의 중심에 서 있다

 

살아온 길 아득하여 잠행으로 떠돈 나날

세월 한 짐 내려놓은 산벚꽃 핀 사월에

허리 휜 바람을 밀고 구름에 잠시 올라

 

망명정부 같은 섬들, 바람의 발자취로

눈물 이랑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내 몸도 남해자락에 기댄 채 마냥 운다

   

 

벚꽃 지는 날 잠에 들다 - 박정호

 

  벚꽃잎 하늘에 날려 적막 우에 쌓이는 날 수관정睡觀亭 관 속에 무심하게 누웠더랬어요 마침내 말도 못하고 울컥, 하던 지천명의 봄.

  몸속에 똬리 튼 걸어온 길이 지워져요 들면 버거웁고 비우면 허전하던 아뜩한 마음자리에 날 흔드는 그대 문득.

  건 듯 바람에 향기로운 꽃 몸짓에 미소 지으며 살아야겠어요 무너져도 찰라지간 눈부신 그래요 세상이에요 일어나요 지금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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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관정: 큰 길 입구에서 벚꽃 길을 걸어(차로도 갈 수 있지만) 십 리에 이르는 곳에 대원사가 있다. 그곳에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수관정이 숨어 있다. 보성군에 속해 있으나 화순군과 이웃하였다.

   

   

두근거림 - 나순옥

 

4월 비는 손끝마다

붓대를 잡고 있나

한 번 지나칠 적마다

세상 빛을 바꿔준다

 

, 오늘

내리는 비는

어떤 색깔 칠하려나

 

4월 비가 생각에도

색칠할 수 있다면

그이와 나의 생각

똑같이 칠해주어

첫사랑

떠나보낸 자리로

불러 올 수 있다면

     

 

계산 - 강현덕

 

천 원에 일곱 마리면 많아도 너무 많다

종이 봉지 밖으로 붕어빵이 넘친다

천 원에 세 마리가 시세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남자는 분주해서 얼굴이 해 같지만

암만해도 웃음이 돈 통엔 들지 않는다

종달새 여자 아이들

예쁜 입들이 밉다

 

속없이 피는 꽃도 나는 마뜩찮다

알량한 햇살 한 줌에 붉음을 다 내놓다니

제 속은 언제나 채우나

어수룩한 계산

 

 

    * 역류 20주년 기념집다시,역류를 꿈꾸다(알토란 북스, 2017)에서

    * 꽃 1. 아그배나무  2. 동백나무  3. 히어리  4.  산벚나무  5. 왕벚나무  6. 노랑붓꽃

           7. 공조팝나무  8. 박태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