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김창집 2018. 11. 14. 17:13


시인의 말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치매행致梅行 3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아

뒤돌아볼 시간이 없다.

 

답잖은 허섭스레기를 끼적거리느라

아내를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다

아내는 홀로 매화의 길을 가고 있다.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2018년 가을에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 세란헌洗蘭軒에서,

洪海里 적음.

    


 

 

오늘은 눈썹도 천근이다

   -치매행致梅行 · 231

 

나이 든 사내

혼자 먹는 밥.

 

집 나간 입맛 따라

밥맛 달아나고,

 

술맛이 떨어지니

살맛도 없어,

 

쓰디쓴 저녁답

오늘은 눈썹도 천근이다.

 

    

 

눈사람

   -치매행致梅行 · 234

 

사랑은 눈사람

겨울 가고 봄이 오면,

 

슬그머니

목련 가지 끝에 앉아 있다.

 

연인들은

목이 말라 사막을 헤매지만,

 

겨울이 가고 나면

나뭇가지마다 꽃을 다는데,

 

아내의 나라에는 봄이 와도

내리 눈만 내려 쌓이고 있다.

    


 

 

한심한 봄날

   -치매행致梅行 · 236

 

흘러가라, !

고여 있으면 썩는다.

 

바람아!

구멍을 만나 피리를 불어라.

울지 않으면 죽는다.

 

돌멩이도 취해서

애를 배는 봄인데,

 

아내여!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고!

    


 

 

길고 멀다

   -치매행致梅行 · 238

 

정은 깊어야 포근하고

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리운 것은 멀리서 반짝이고

별은 멀어서 그립다.

 

그래서

사랑이다.

 

하여,

그리 깊고도 먼 것인가, 아내여!

    


 

 

꽃과 별

   -치매행致梅行 · 240

 

꽃을 노래하지 않는 시인이 있는가

별을 노래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꽃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별을 아는 시인이 있는가

 

아낸 꽃을 쳐다보면서 꽃을 보지 않고

나는 별을 바라보면서 별을 보지 않고

 

지상에 꽃이 피어야 하늘엔 별이 뜨고

내가 봐야 꽃도 피고 별도 뜨는 것이냐

 

아내도 한때는 향기로운 꽃이었고

내 어둔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었다.

 

 


    -치매행致梅行 · 242

 

먹어도 치료가 되지 않는 약을

아침저녁으로 먹입니다.

 

알약을 못 삼키니

유발에 갈아서 복용시킨 지 벌써 몇 년째,

 

오늘도 아침에 다섯 알

저녁에 여섯 알을 깨고 갈아 먹입니다.

 

내일은 매화꽃이 피겠지 하며

억지로 먹이니 어디 꽃이 피겠습니까?

 

약은 약이고

꽃은 꽃입니다.

    

 

    

 

따로식구

   -치매행致梅行 · 246

 

아내는 침대에서 밥을 받아먹고

나는 홀로 쓸쓸히 슬픈 식사를 한다

 

살아 있는 밥이어야 맛이 있지

맛없는 병든 밥은 밥도 아니다

 

고봉밥도 적던 시절이 있었거니

이제는 두어 술 깨죽깨죽거리니

 

이것도 식사를 하는 것인가 몰라

식구란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인데

 

묻노니, 따로따로 먹는

우리는 한 식구인가?

    


 

 

죄받을 말

   -치매행致梅行 · 262

 

아픈 아내 두고 먼저 가겠다는 말

앓는 아내를 두고 죽고 싶다는 말

 

하지 말아야하는데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어쩌자고 점점 약해지는지

 

삶의 안돌이 지돌이를 지나면서

다물다물 쌓이는 가슴속 시름들

 

뉘게 안다미씌워서야 쓰겠는가

내가 지고 갈, 내 안고 갈 사람.

    

 

             * 홍해리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우리시인선 050, 2018.)에서

                                       * 사진 : 느티나무와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