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설飛雪
가슴에 품은 아기 잠시 내려놓아요
휘날리는 눈처럼 찬란한 햇살아래 아 아 눈이 부시나요 고개를 못 드나요 제발 가슴을 여세요 구부린 몸 이제 펴세요 뼈 속에 파고드는 공포와 추위도 잊고 맨발의 젖은 옷자락 두 팔에 안은 아기와 숨을 몰아쉬며 무작정 뛰었지요 아이만 내 아이만, 쫓기는 이유 모를 그, 순간이었나요 폭설에 갇혀버린. 거친오름 푸른빛에 반짝이는 등심붓꽃 젖 먹던 그 힘으로 바닥 차오른 아기별들 봐요
내쉰 숨 칭얼대던 울음
까르르 웃는 오월
♧ 가마우지
목울대 뱉은 내 새끼 어디로 갔을까
둥지로 날 수 없어 홀로 앉은 갯바위
바닷가 해무로 피는 봄
슬픔을 다 가둔다
♧ 엉또폭포
산정을
끼고 내려
흩어진 형제들
한핏줄의 만남은
서로를 당기는지
손깍지 부둥켜안은 몸
곤두박질
절벽 아래
비명이 바닥을 쳐
벼랑을 세우고
순식간 마음 얼고
눈과 귀를 멀게 하여
비로소
저 먼 바다로, 쓸려간다
어미 품 간절히
♧ 평사리 범부채꽃
지리산 자락 운명 꿰차 들어갔던 사내가
참판 댁 돌담 곁에 저 홀로와 서 있네
붉은 점 화인 같은 사랑 안개비에 젖고 있네
♧ 술패랭이꽃
짐을 싸 나갔던 바람 수몰지로 와 휩쓸리네
가을이 당도하여 더 간절한 피붙이들
제방 위 내리는 하늘, 툭 찔리는 속눈썹
♧ 함덕
-서우봉
싸르릉 사르릉 드센 바람 다 품어 안아
동쪽 기슭 파헤쳐진 가슴들을 어른다
저 바다
오름만 한 소
수굿이 누워있다
♧ 백합
늦여름
뜻밖의
그녀와 마주쳤다
풀 먹인 넓은 칼라
옛일들
고스란히
모퉁이
견디어 온 날
저 안간힘
쓸쓸하다
♧ 사월 월령바다
사월 바다는 허옇게 뭍으로 달려든다
끝내 손 놓아 버린 핏줄을 부르듯
저토록 짐승의 소리
온몸 들썩이며 운다
입술 끝에 올려놓아 함부로 말하던
갯바위 선인장길 가슴에 박힌 가시는
오래된 상처로 남아
바람처럼 휘청댄다
파도에 넋 잃듯 멈춘 풍력기 다시 돈다
아직도 안 끝난 노래 예 와서 부르듯
쇳덩이 바다를 향해
마른 거품 잔뜩 날린다
* 김윤숙 시집 『참빗살나무 근처』(도서출판 작가, 2018.)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영춘 시집 '단애에 걸다'(2) (0) | 2018.11.30 |
---|---|
홍해리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 (0) | 2018.11.27 |
김순란 시집 '순데기'와 감 (0) | 2018.11.24 |
강상돈 시조집 '느릿느릿 뚜벅뚜벅' (0) | 2018.11.22 |
'우리시詩' 11월호의 시 - 2 (0) | 2018.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