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윤숙 시집 '참빗살나무 근처'(2)

김창집 2018. 11. 25. 23:04


비설飛雪

 

  가슴에 품은 아기 잠시 내려놓아요

 

  휘날리는 눈처럼 찬란한 햇살아래 아 아 눈이 부시나요 고개를 못 드나요 제발 가슴을 여세요 구부린 몸 이제 펴세요 뼈 속에 파고드는 공포와 추위도 잊고 맨발의 젖은 옷자락 두 팔에 안은 아기와 숨을 몰아쉬며 무작정 뛰었지요 아이만 내 아이만, 쫓기는 이유 모를 그, 순간이었나요 폭설에 갇혀버린. 거친오름 푸른빛에 반짝이는 등심붓꽃 젖 먹던 그 힘으로 바닥 차오른 아기별들 봐요

 

  내쉰 숨 칭얼대던 울음

  까르르 웃는 오월

 


 

 

가마우지

 

목울대 뱉은 내 새끼 어디로 갔을까

 

둥지로 날 수 없어 홀로 앉은 갯바위

 

바닷가 해무로 피는 봄

 

슬픔을 다 가둔다

 


 

 

엉또폭포

 

산정을

끼고 내려

흩어진 형제들

 

한핏줄의 만남은

서로를 당기는지

 

손깍지 부둥켜안은 몸

곤두박질

절벽 아래

 

비명이 바닥을 쳐

벼랑을 세우고

 

순식간 마음 얼고

눈과 귀를 멀게 하여

 

비로소

저 먼 바다로, 쓸려간다

어미 품 간절히

 


 

 

평사리 범부채꽃

 

지리산 자락 운명 꿰차 들어갔던 사내가

 

참판 댁 돌담 곁에 저 홀로와 서 있네

 

붉은 점 화인 같은 사랑 안개비에 젖고 있네

 


 

 

술패랭이꽃

 

짐을 싸 나갔던 바람 수몰지로 와 휩쓸리네

 

가을이 당도하여 더 간절한 피붙이들

 

제방 위 내리는 하늘, 툭 찔리는 속눈썹

 


 

 

함덕

   -서우봉

 

싸르릉 사르릉 드센 바람 다 품어 안아

 

동쪽 기슭 파헤쳐진 가슴들을 어른다

 

저 바다

 

오름만 한 소

 

수굿이 누워있다

 

 

 

백합

 

늦여름

 

뜻밖의

 

그녀와 마주쳤다

 

풀 먹인 넓은 칼라

 

옛일들

 

고스란히

 

모퉁이

 

견디어 온 날

 

저 안간힘

 

쓸쓸하다

 


 

 

사월 월령바다

 

사월 바다는 허옇게 뭍으로 달려든다

끝내 손 놓아 버린 핏줄을 부르듯

저토록 짐승의 소리

온몸 들썩이며 운다

 

입술 끝에 올려놓아 함부로 말하던

갯바위 선인장길 가슴에 박힌 가시는

오래된 상처로 남아

바람처럼 휘청댄다

 

파도에 넋 잃듯 멈춘 풍력기 다시 돈다

아직도 안 끝난 노래 예 와서 부르듯

쇳덩이 바다를 향해

마른 거품 잔뜩 날린다

 

 

                 * 김윤숙 시집 참빗살나무 근처(도서출판 작가,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