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잠에서 쫓겨난 달콤한 꿈
다시 눈을 감고 깨어진 꿈을 더듬거리다
이어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달래며
아침 달리기로 새날을 시작하곤 했다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엮어
겁 없이 작품으로 묶어보았다
입 언저리에서 맴돌았던 말
꺼이꺼이 주워 담았던 것들을 내어놓았다
세상 모든 가족의 안부를 물으면서
2018년 6월
김 순 란
♧ 순데기
벼 이삭 패는 것을 처음 본다는 순데기
벼꽃이 예쁘다고 논두렁에 풍덩 빠진 순데기
무성한 논에 물이 찰랑거리는 게 신기한 순데기
달개비꽃이 파랗다는데
너무 무서워서 파랗다는데
이혼 도장 찍는 날 달개비꽃이 피었다지
열 살배기 아들 눈치 보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지
치과의사 아들 만나러 가는 길에
가지런히 피어나는 벼 이삭들 으쓱으쓱
달개비꽃 서너 송이 살랑살랑
해바라기 고개 숙여 끄덕끄덕
족ᄒᆞㄴ 아들 키우젠 ᄒᆞ난 고생 하영 ᄒᆞ여신 게
♧ 하산 명령
겨울 산에 오르려니
눈이 내렸다
내린 눈은 자꾸 발목을 잡아당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발 두 발
눈과 힘겨루기 하며 제 갈 길 갔다
새해 첫날 첫 시간
적십자 대피소는
꾸역꾸역 들어서는 등산객을 맞이하였다
등산객들 뒤에 겨울 산도 따라 들어왔다
겨울 산 꼬리 물고
허공을 주름잡던 서슬 퍼런 눈송이도 따라 들어왔다
공지사항
“겨울 산이 눈사태로 대피소에 대피 중이오니
모든 등산객은 지금 즉시 하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 퇴고
감물은 하얀 직물 위에서 춤을 추었지
오뉴월 햇살은 감물을 달구어 주었어
먹물은 감물과 어우러져 검붉은 구릿빛으로 물들었고
밑그림 없는 바탕에
감물 섞인 먹물로 태양은 제멋대로 수채화를 그려 주었지
퇴고 하는 날
스팀다림질로
구김을 펼 줄 알았지
♧ 화가와 까마귀
바람 불면 까마귀 날아들었다
파도가 몰아치는 날이면
까마귀는 초가에서 온종일 함께 놀았다
늙은 소나무 서서 잠자는 밤이면
까마귀는 소나무 가지에 들어 소나무와 잠잤다
뿔테안경과 지팡이를 초가 난간에 벗어놓고
바람에 흔들리며 신음하는
한 남자 있어
그의 손끝으로
까마귀가 소나무와 바람을 데리고 왔다
바람 부는 날이면
초가집 울 늙은 소나무
까마귀와 한 남자를 품었다
♧ 기상도를 그리다
떫은 감 즙 내어
해바라기 씨앗으로 그림을 그렸다
태풍이 불어온대서
감즙 먹은 광목에 기상도가 그려졌다
거센 바람과 비를 데리고 온다는 예보를
감즙 먹은 광목이 거칠게 안아버렸다
벌겋게 바랜 갈천 위에서
해바라기와 고추 씨앗이 줄다리기 하고
참새와 고추잠자리 식 벼리고 있다
♧ 청출어람
누룩에서
잿물에서
니람에서
초록에서
파랑으로 번지는 작업이다
김이 흩날리더라도
불꽃이 춤을 추더라도
그림 그려지고
색은 올랐다
희미한 쪽에서
점점 짙어지는 쪽으로
담금질이 계속되어 갈수록
푸른빛은 점점 더 깊었다
물속으로 한나절 숙면하고 나면
높은 하늘빛에 견주기라도 하듯
물에서부터 깊은 쪽빛을 품었다
눈썹달이 미소 지었다
♧ 물질
물에 든다는 것은
한 그루 나무를 심는 것이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거문고 퉁겨지는 소리 듣는 것이다
물에 든다는 것은
처마 밑 둥지에서 떨어진 제비 새끼
다리 부러지거나 말거나
더운 여름날 늙은 개 한 마리
아가리 벌려 벌건 혓바닥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에 든다는 것은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 잡아당겨
가을 햇볕 따스하게 드나드는 불턱에서
솜털 같은 비단 실 뽑아내는 것이다
물에 든다는 것은
눈송이 쫓아 살랑거리는 강아지처럼
흑진주 요령소리로 파도가 꼬드김 할 때
주저 없이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물에 든다는 것은
헐렁한 하루를 곰삭혀
내 새끼 어린 꿈을 키우는 것이다
* 김순란 시집 '순데기'(파우스트, 201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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