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딱히 이렇다 할 작품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좀 서툴고 어수룩하고
볼품없으면 어떠랴.
튼실한 생명 하나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뚜벅뚜벅 내 길을 걸어갈 것이다.
2018년 가을에
강 상 돈
♧ 명함
널브러진 낙엽 몇 장
묵직이 밟고 서서
눌림과 구겨짐이
흑점으로 태어난
내 이력
점자로 찍어
방점 하나 남긴다
♧ 어떤 풍경
천천히 가는 것도
세상사는 법이구나
돌담 따라 할머니 몇
유모차를 끌고 간다
낭자한
오색물빛에
느리게 찍힌 발자국
♧ 달팽이 1
느릿느릿 가는데 무슨 욕심 더 부리랴
집 한 채 있으면 그걸로 만족한데
축축한 봄날이 오면 느림보로 살고 싶다
♧ 달팽이 4
등에 진 짐 무거워도
차마 내려놓지 못한
어머니의 어깨 위에
또 하나 짐을 얹네
그 무게
감내하면서
숙명처럼 이고 가는
♧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가볍게 내딛는 발걸음이면 좋겠다
밀주 같은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기나긴 세월 속으로 새들도 오고 가고
생각이 깊어지면 유물로 되살아날까
내 몫처럼 오래 앉아 한 시대를 풍유하는
아득한 숨결을 찾아 찐한 향기 다가온다
남겨둔 시간의 굴레 여기에 와 머물고
돌담 위에 올려놓은 설익은 마음도
동자석 소담한 미소 너만 보면 일렁인다
이곳에선 멈춤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빗장을 연 정주석이 긴 안부를 물어오고
바람이 건네준 밀어 오늘 또 꺼내 읽는다
♧ 가을 산행
꺼질 수 없는 여름날이 여태까지 타고 있는
단풍잎도 따라 나선 사라봉 산책길에
한 마리 직박구리가 고요를 깨고 있다
굳은살도 이런 날이면 단풍물이 드는가
타오르지 못한 꿈 가슴깊이 품을 때
제 몸을 뜨겁게 태운 흔적 하나 보인다
듬성듬성 밟아온 아픔은 지워졌다
근육질 저 소나무 나선형 길을 내주고
오늘도 놀을 벗 삼아 가쁜 숨을 내젓는다
♧ 도시의 가을
가을이 다 가기 전 너희 흔적 찾으리라
첫발 뗀 아이처럼 일터 찾아 처음 나선
동홍동 출근길에서 마음 설레던 날
저마다 익숙함으로 꿈 하나 엮어가고
빛바랜 그림자가 내 곁에 와 머물러
잊었던 그리움들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우면 오시라, 단박에 오시라
감빛 불러 세운 저녁 저만치 물러두고
운동화 끌며 온 자리 밑창만 닳았다
돌아보면 누구인들 아픈 상처 없겠는가
계약동거가 끝난 도시의 한복판에서
단 한번 휘두른 칼날 핏발마저 곧게 선다
♧ 눈 내린 아침
백악기 한 세기쯤 건너온 눈만 같다
깊게 파인 새 발자국 화석으로 찍혀서
아무도
밟지 못한다
저 하얀 고요의 길
* 강상돈 시조집『느릿느릿 뚜벅뚜벅』(열림문화 시선 009, 2018.)에서
* 요즘의 플라타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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