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상돈 시조집 '느릿느릿 뚜벅뚜벅'

김창집 2018. 11. 22. 17:05


시인의 말

 

딱히 이렇다 할 작품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좀 서툴고 어수룩하고

볼품없으면 어떠랴.

튼실한 생명 하나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뚜벅뚜벅 내 길을 걸어갈 것이다.

 

2018년 가을에

강 상 돈

 


 

 

명함

 

널브러진 낙엽 몇 장

묵직이 밟고 서서

 

눌림과 구겨짐이

흑점으로 태어난

 

내 이력

점자로 찍어

방점 하나 남긴다

 


 

 

어떤 풍경

 

천천히 가는 것도

세상사는 법이구나

 

돌담 따라 할머니 몇

유모차를 끌고 간다

 

낭자한

오색물빛에

느리게 찍힌 발자국

 


 

 

달팽이 1

 

느릿느릿 가는데 무슨 욕심 더 부리랴

 

집 한 채 있으면 그걸로 만족한데

 

축축한 봄날이 오면 느림보로 살고 싶다

 


 

 

달팽이 4

 

등에 진 짐 무거워도

차마 내려놓지 못한

 

어머니의 어깨 위에

또 하나 짐을 얹네

 

그 무게

감내하면서

숙명처럼 이고 가는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가볍게 내딛는 발걸음이면 좋겠다

밀주 같은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기나긴 세월 속으로 새들도 오고 가고

 

생각이 깊어지면 유물로 되살아날까

내 몫처럼 오래 앉아 한 시대를 풍유하는

아득한 숨결을 찾아 찐한 향기 다가온다

 

남겨둔 시간의 굴레 여기에 와 머물고

돌담 위에 올려놓은 설익은 마음도

동자석 소담한 미소 너만 보면 일렁인다

 

이곳에선 멈춤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빗장을 연 정주석이 긴 안부를 물어오고

바람이 건네준 밀어 오늘 또 꺼내 읽는다

 


 

 

가을 산행

 

꺼질 수 없는 여름날이 여태까지 타고 있는

단풍잎도 따라 나선 사라봉 산책길에

한 마리 직박구리가 고요를 깨고 있다

 

굳은살도 이런 날이면 단풍물이 드는가

타오르지 못한 꿈 가슴깊이 품을 때

제 몸을 뜨겁게 태운 흔적 하나 보인다

 

듬성듬성 밟아온 아픔은 지워졌다

근육질 저 소나무 나선형 길을 내주고

오늘도 놀을 벗 삼아 가쁜 숨을 내젓는다

   


 

 

도시의 가을

 

가을이 다 가기 전 너희 흔적 찾으리라

첫발 뗀 아이처럼 일터 찾아 처음 나선

동홍동 출근길에서 마음 설레던 날

 

저마다 익숙함으로 꿈 하나 엮어가고

빛바랜 그림자가 내 곁에 와 머물러

잊었던 그리움들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우면 오시라, 단박에 오시라

감빛 불러 세운 저녁 저만치 물러두고

운동화 끌며 온 자리 밑창만 닳았다

 

돌아보면 누구인들 아픈 상처 없겠는가

계약동거가 끝난 도시의 한복판에서

단 한번 휘두른 칼날 핏발마저 곧게 선다

 


 

 

눈 내린 아침

 

백악기 한 세기쯤 건너온 눈만 같다

 

깊게 파인 새 발자국 화석으로 찍혀서

 

아무도

밟지 못한다

 

저 하얀 고요의 길

 

 

* 강상돈 시조집느릿느릿 뚜벅뚜벅(열림문화 시선 009, 2018.)에서

* 요즘의 플라타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