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63호의 시와 눈길

김창집 2019. 1. 7. 17:52


열애 - 김승립

 

입추 무렵

비 한 줄기 겨우 지나간 후

폭염 아래 고추잠자리들이 나른하게 짝짓기 하고 있다

아니 그것들은 서로 격렬하게 탐닉하고 있다

폭염의 빨간 햇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보다 더 벌겋게 생을 구가하고 있지 않은가

세찬 빗발 아래서든 뜨거운 불볕 아래서든

나른하게격렬하게사이

그냥 서로에게 절실히 포개져

스스로를 벌겋게 태우는 삶도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먼 산에 단풍 들겠다

   

 

 

밀감 - 나기철

 

밤 깊은 시청 앞 큰 통 옆

검은 비닐봉지 몇 개

밀감 앞에 놓고

쪼그려 앉은 여자

적선하듯 만원 주고 사 와

먹어 보니

그저 그렇다 가짠가

 

하루 이틀 사흘

하나씩 먹어 보니

점점 진한 맛!

 

오늘 아침

버스 정류장

젊은 여자 하나

앉아 떨고 있다

   

 

 

등이 환하다 - 배진성

 

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벅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올레, 외로움의 시작점 - 김연미

 

살짝 살짝 엿보다 마당까지 들어와 버린

결명자 서너 포기 엉거주춤 서 있다

돌담 위 틈을 엿보던 콩넝쿨도 내려오고

 

초침처럼 오가던 발자국이 멈추고

고장 난 시계처럼 정지된 풍경 속으로

구부정 가을이 홀로 빈 유모차 끌며 가고

 

길은 늘 외로움에 시작점을 찍었지

발자국을 지우며 뿌리내린 풀잎 사이로

황갈색 바람 한줄기 시작점을 또 찍어.

   

 

 

포토라인 - 김영란

 

  빨간 명품로고 번쩍이는 신발 신고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정면에서 또 한 번, 허투루 시선 맞춰 영혼 없는 조아림, 구름 속 저 계단을 오늘도 오를 거야. 따라붙는 질문과 찰칵이는 셔터 소리가 회전문 돌아갈 때 잘려져 사라지고 눌러쓴 모자에 목도리와 마스크, 삼각형 노란 표시 비선실세 그 지점에

 

  눈빛은 스캔하지 마

  분위기 파악 못한 그녀

   

 

 

장마 - 김영숙

 

난바다 절울음*

귀가 봉봉 그리움 봉봉

 

해거름 묏비둘기

애걸복걸 사연을 듣다

 

우잣담 늙은 능소화

이른 등을 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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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울음 : 해조음.

   

 

 

난해한 아침 - 김진숙

 

트로이목마 병사들처럼 소리 없이 몰려와

 

고내봉 턱밑까지 초가을이 침투한 아침

 

안개는 나를 버리고 저만 혼자 내렸다

   

 

 

숲을 걷는 것은 - 오영호

 

숲을 걷는 것은

몸과 맘 씻고 씻는 것

나뭇잎 팔랑이는 새소리 바람소리

구겨진 내 영혼의 옷을

다림질을 시작하고

 

한 발짝 옮길 때마다 펄펄 솟는 생기

소나무 편백나무 쏟아내는 피톤치드에

더러운 영혼의 곳간도

걸레질을 시작하네

 

 

                                  *제주작가2018년 겨울호(통권63)에서

                         * 사진 : 첫눈, 두번째 눈일 때 사려니숲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