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애 - 김승립
입추 무렵
비 한 줄기 겨우 지나간 후
폭염 아래 고추잠자리들이 나른하게 짝짓기 하고 있다
아니 그것들은 서로 격렬하게 탐닉하고 있다
폭염의 빨간 햇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보다 더 벌겋게 생을 구가하고 있지 않은가
세찬 빗발 아래서든 뜨거운 불볕 아래서든
‘나른하게’와 ‘격렬하게’ 사이
그냥 서로에게 절실히 포개져
스스로를 벌겋게 태우는 삶도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먼 산에 단풍 들겠다
♧ 밀감 - 나기철
밤 깊은 시청 앞 큰 통 옆
검은 비닐봉지 몇 개
밀감 앞에 놓고
쪼그려 앉은 여자
적선하듯 만원 주고 사 와
먹어 보니
그저 그렇다 가짠가
하루 이틀 사흘
하나씩 먹어 보니
점점 진한 맛!
오늘 아침
버스 정류장
젊은 여자 하나
앉아 떨고 있다
♧ 등이 환하다 - 배진성
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벅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 올레, 외로움의 시작점 - 김연미
살짝 살짝 엿보다 마당까지 들어와 버린
결명자 서너 포기 엉거주춤 서 있다
돌담 위 틈을 엿보던 콩넝쿨도 내려오고
초침처럼 오가던 발자국이 멈추고
고장 난 시계처럼 정지된 풍경 속으로
구부정 가을이 홀로 빈 유모차 끌며 가고
길은 늘 외로움에 시작점을 찍었지
발자국을 지우며 뿌리내린 풀잎 사이로
황갈색 바람 한줄기 시작점을 또 찍어.
♧ 포토라인 - 김영란
빨간 명품로고 번쩍이는 신발 신고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정면에서 또 한 번, 허투루 시선 맞춰 영혼 없는 조아림, 구름 속 저 계단을 오늘도 오를 거야. 따라붙는 질문과 찰칵이는 셔터 소리가 회전문 돌아갈 때 잘려져 사라지고 눌러쓴 모자에 목도리와 마스크, 삼각형 노란 표시 비선실세 그 지점에
눈빛은 스캔하지 마
분위기 파악 못한 그녀
♧ 장마 - 김영숙
난바다 절울음*에
귀가 봉봉 그리움 봉봉
해거름 묏비둘기
애걸복걸 사연을 듣다
우잣담 늙은 능소화
이른 등을 켭니다.
---
*절울음 : 해조음.
♧ 난해한 아침 - 김진숙
트로이목마 병사들처럼 소리 없이 몰려와
고내봉 턱밑까지 초가을이 침투한 아침
안개는 나를 버리고 저만 혼자 내렸다
♧ 숲을 걷는 것은 - 오영호
숲을 걷는 것은
몸과 맘 씻고 씻는 것
나뭇잎 팔랑이는 새소리 바람소리
구겨진 내 영혼의 옷을
다림질을 시작하고
한 발짝 옮길 때마다 펄펄 솟는 생기
소나무 편백나무 쏟아내는 피톤치드에
더러운 영혼의 곳간도
걸레질을 시작하네
*『제주작가』2018년 겨울호(통권63호)에서
* 사진 : 첫눈, 두번째 눈일 때 사려니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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