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성운 시조집 '버릴까'에서

김창집 2019. 1. 21. 15:43


- 홍성운

 

미루나무

까치집

월세로 세줬나 보다

아파트 불빛들이 하나둘 지워질 즈음

보름달

떡하니 앉아

우듬지가 휘어진다

 

오랜만에

찾아온

초등학교 친구 같은

창문을 도닥이는 달빛이 반가워서

말없이 따라나선다

길모퉁이

목롯집

     

 

괴불주머니

 

눈길 주면 주는 대로

그냥 가면 가는 대로

 

바람 막은 담장 어귀

자리 하나 펼치고

 

섬 햇살 주머니 가득

허리춤에 차는 봄날

     

 

민들레

 

빗장 푼

 

대궁이 끝

 

달뜬 솜사탕 같은,

 

행인 발길 조심하라 노란 조끼 덧입혔던

 

그 아이 꿈을 먹는다

 

하얀 꽃씨

 

날리는

   

 

 

겨울 천리향

 

21세기 자본*을 읽다 마당에 나갔더니

돌확에 고인 물이 아직 얼어 있다

그 곁에 작은 천리향

빙점에서 짙푸른

 

조금은 알 것 같다, 몇 년째 저랬으니

모두들 움츠릴 때 외려 몸을 추슬러

체온이 데워진 봄날

빈터 와락 물들이겠다

 

자본의 무한축적내 생각 예서 멈춰

오체투지 굴뚝농성 꽃망울들 신산하다

천리 밖 살얼음 어는

겨울 강물

겨울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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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 피케티의 경제학서.

   

 

 

망초꽃

 

산골의 소낙비는

빈손으로 오지 않아

 

여름밤 별무리를

한 자루

가득 쟁여

 

풀벌레

울음 꼭지에

별 총총

품고

산다

   

 

 

광대야 줄광대야!

 

봄 햇살을 반기는 곳 어디 오름뿐이랴

양지에 오종종히 모여 앉은 광대나물

바람이 슬쩍 불어도 붉은 상모 돌린다

 

섬에서 광대하려면 영등달*도 나서야 한다

칠머리당 영등굿으로 겨우 달랜 제주바람

물 강정 너럭바위에 구럼비낭으로 울고 있다

 

살다보면 누군들 휘돌고 싶지 않을까

누대를 이어온 섬의 남쪽 강정마을

여기선 빚진 일 없이 모두 죄인이 된다

 

상모를 돌린다고 광대소릴 듣겠냐만

바다 막은 금줄 너머 수평선을 탈까보네

타다가 두름 엮이면 줄광대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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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2월을 말하며, 이때 영등신(바람의 신)인 영등할망이 내려옴.

     

 

내 맘속의 멀구슬나무

 

동네 어귀를 돌아 아름드리 멀구슬나무

 

대소사가 있거나 돼지를 추렴 할 때

 

기꺼이 굵은 가지를 내주곤 하였다

 

부르지 않아도 아이들은 모여든다

 

툭 던진 오줌보 하나, 한나절이 지나가고

 

설익은 고기 한 점에 나 또한 행복했다

 

빡빡 깎은 머리에 괜히 앙탈 부릴 때

 

그런 날 멀구슬나무는 보랏빛으로 다가와

 

온종일 함께하여도 향기 가시지 않았다

 

둥치의 주름이야 한 낱 세월이겠지

 

유배 온 조선 임금, 면류관 주렴 같은

 

겨우내 섬 하늬 앞에 멀구슬을 달고 있다

 

 

                  * 홍성운 시조집버릴까(푸른사상 시선 96.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