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 - 홍성운
미루나무
까치집
월세로 세줬나 보다
아파트 불빛들이 하나둘 지워질 즈음
보름달
떡하니 앉아
우듬지가 휘어진다
오랜만에
찾아온
초등학교 친구 같은
창문을 도닥이는 달빛이 반가워서
말없이 따라나선다
길모퉁이
목롯집
♧ 괴불주머니
눈길 주면 주는 대로
그냥 가면 가는 대로
바람 막은 담장 어귀
자리 하나 펼치고
섬 햇살 주머니 가득
허리춤에 차는 봄날
♧ 민들레
빗장 푼
대궁이 끝
달뜬 솜사탕 같은,
행인 발길 조심하라 노란 조끼 덧입혔던
그 아이 꿈을 먹는다
하얀 꽃씨
날리는
♧ 겨울 천리향
『21세기 자본』*을 읽다 마당에 나갔더니
돌확에 고인 물이 아직 얼어 있다
그 곁에 작은 천리향
빙점에서 짙푸른
조금은 알 것 같다, 몇 년째 저랬으니
모두들 움츠릴 때 외려 몸을 추슬러
체온이 데워진 봄날
빈터 와락 물들이겠다
‘자본의 무한축적’ 내 생각 예서 멈춰
오체투지 굴뚝농성 꽃망울들 신산하다
천리 밖 살얼음 어는
겨울 강물
겨울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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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 피케티의 경제학서.
♧ 망초꽃
산골의 소낙비는
빈손으로 오지 않아
여름밤 별무리를
한 자루
가득 쟁여
풀벌레
울음 꼭지에
별 총총
품고
산다
♧ 광대야 줄광대야!
봄 햇살을 반기는 곳 어디 오름뿐이랴
양지에 오종종히 모여 앉은 광대나물
바람이 슬쩍 불어도 붉은 상모 돌린다
섬에서 광대하려면 영등달*도 나서야 한다
칠머리당 영등굿으로 겨우 달랜 제주바람
물 강정 너럭바위에 구럼비낭으로 울고 있다
살다보면 누군들 휘돌고 싶지 않을까
누대를 이어온 섬의 남쪽 강정마을
여기선 빚진 일 없이 모두 죄인이 된다
상모를 돌린다고 광대소릴 듣겠냐만
바다 막은 금줄 너머 수평선을 탈까보네
타다가 두름 엮이면 줄광대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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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2월을 말하며, 이때 영등신(바람의 신)인 영등할망이 내려옴.
♧ 내 맘속의 멀구슬나무
동네 어귀를 돌아 아름드리 멀구슬나무
대소사가 있거나 돼지를 추렴 할 때
기꺼이 굵은 가지를 내주곤 하였다
부르지 않아도 아이들은 모여든다
툭 던진 오줌보 하나, 한나절이 지나가고
설익은 고기 한 점에 나 또한 행복했다
빡빡 깎은 머리에 괜히 앙탈 부릴 때
그런 날 멀구슬나무는 보랏빛으로 다가와
온종일 함께하여도 향기 가시지 않았다
둥치의 주름이야 한 낱 세월이겠지
유배 온 조선 임금, 면류관 주렴 같은
겨우내 섬 하늬 앞에 멀구슬을 달고 있다
* 홍성운 시조집『버릴까』(푸른사상 시선 96. 201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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