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산림문학 겨울호의 시와 상고대

김창집 2019. 1. 9. 23:09



폭설에 가지 찢겼어도 - 차옥혜

 

아가야 울지 마라

폭설에 가지 찢겼어도

우리는 천년을 사는 소나무다

떨어져나간 팔의 거름으로

우리는 자라고

우리는 하늘로 가고 있다

한겨울에도 푸른빛 잃지 않는

우리는 소나무다

폭풍이 불어도 눈보라쳐도

허리 굽히지 않는

우리는 소나무다

잃어버린 팔이 끝내는

네게 돌아와 안길 것이니

아가야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천년을 꿈꾸는 소나무다

아파도아파도 견디며

하늘을 우러르는

우리는 소나무다

 

 

 

꼬리겨우살이 - 강영순

 

정선 깊은 산골

겨울 민둥산

새벽에 눈 비비며 찾아갔네

 

가파른 산길 올라

상수리 갈참 졸참

빽빽이 우거진 숲

, 저기 좀 봐

잎 진 앙상한 가지에

까치집 둥지 모양

노란 치마 한껏 부풀린

겨우살이 좀 봐!

 

겨우겨우 못숨 부지한다고

겨우살이라 부르는 줄 알았는데

남의 몸에 제 목숨 붙이고도

저렇게 당당한 자태라니

 

높디높은 가지 끝

푸른 하는 배경 삼아

주렁주렁 노란 열매꼬리처럼 늘어뜨리고

세찬 바람에도 느긋이 일렁이며

보란 듯 이 겨울 기세등등하겠지

 


  

나뭇가지 - 구자운

 

잎이 달렸던 자리

꽃이 피었던 자리

씨가 열렸던 자리

새가 앉았던 자리

 

비가 뿌리는 자리

눈이 내리는 자리

달이 머무는 자리

바람이 스친 자리

   

 

 

나무는 - 국중홍

 

때론 하늘로

때론 땅속으로

저 혼자 길을

만들어간다

 

새와 벌레에게

문을 열어

여름엔 시원한 그늘 주고

겨울엔 햇살 받아들인다

 

뿌리는 땅속에 묻혀

그리움 견디며

언제나 그 자리에서

외로움 참아낸다

 

살 찢어 새 순 트고

서로 만나 숲 가꿔

마침내 사랑을 이룬다

   

 

 

겨울나무 - 김귀녀

 

석양을 등지고 나무가 서 있다

수피가 국수 가락처럼 갈라져있다

 

삶의 무게 이기지 못해

밤새 뒤척인 푸석한 얼굴

끙 웅크린다

 

나는 나무가 익숙하다

바람의 경계마다 가지를 흔드는 나무

 

순한 이파리를 감싸던 나무

슬픔 끝까지 참아내는 옹이진 몸

 

꽃샘추위 지나면

말씀처럼 들리는 평화로운 봄

 

눈물이 왜 따뜻한지

나는 운명처럼 묻지 않는다

   

 

 

동사한 빨간 장미 다발 - 김금용

 

누가 던졌을까

살얼음 진 강물 속에서 동사한 빨간 장미 다발

얼어서 더 싱싱하게 빛을 뿜는

칼바람 속 유혹

저 장미는 어쩜 나르시스에 빠졌을지 몰라

그대의 간절함이 고드름으로 매달려도

담 너머 지나가는 짓궂은 바람일 뿐이라고

어리석은 오만의 가시만 키웠을지 몰라

따뜻한 방안의 화병에 꽂을 수 없었겠지

내 버석거리는 머리에도

그대의 쿵쾅거리는 가슴에도 꽂을 수 없었겠지

파묻어도 꼿꼿이 일어서는 지난겨울 언 강의 기억

서로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열매를 맺게 한다는 은행나무 속설 따라

차단된 얼음 속에 비밀한 사랑을 가둔 걸까

얼어서 더 붉고 싱싱하게 살아나는 장미다발

누가 던졌을까

   

 

 

눈 내리는 겨울호수 - 김내식

 

아무런 약속도

기다릴 사랑도 없고

낭만의 추억도 시드는 나이지만

나름대로는 푸르고 싱그럽던 청춘이 어느 듯

서걱거리는 호숫가 갈대처럼

산 넘어 불어오는 칼바람에

봄날을 떠올린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구를 사랑하고 그리워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얼어붙은 호수에 앙상한 나뭇가지조차

비추어지지 않는 마음 거울

싸락눈이 싸드락 싸드락

차고 슬픈 가락으로

귀를 때린다

얼음에 구멍 뚫고

창자까지 내비치는 빙어를

낚아 올리는 강태공처럼

차라리 텅 비어있는 마음 갖고

맑은 영혼이나 되고 지고

눈 오는 호수 길

홀로 걷는다

   

 

 

겨울 산수유 - 김영자

 

가슴 안쪽을 들여다보면

천 개의 통로가 보인다

달의 눈을 손에 들고

잎사귀도 없이 꽃을 피우던 출구

 

그 등을 닫고 누워 뒤척이며

되살아 오르기를

안 밖으로 다시 트이기를

새순의 아랫배에서

까치밥 한 입의 무게로 남아

붉은 몸으로 기다린다

 

그러나 잠시 물 흐름 멈추어선 겨울 한복판

둥글고 단단한 새들의 붉은 눈

접목한다 겨울 산수유 물구나무선다

 

 

                                 * 글 :산림문학2018년 겨울호(통권32)에서

                                 * 사진 : 제주 1100도로 휴게소 주변의 상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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