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자존심 - 정일남
시인이라고 기죽어 살 순 없다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가난을 자처한 것이 죄가 될 수 있지만
시를 쓴다고 감옥에 보낼 법조문은 없다
가슴 펴고 얼굴 들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시에 매진하는 것이 손에 잡히는 게 없지만
영혼에서 건져 올린 광채
미지에 해바라기 왕국 하나 개척한다고 생각하라
고개 숙이고 풀 죽어 살지 말고
물질과 권력을 쥔 사람과 맞서서
시 한 수로 이긴다고 생각하라
권력을 이기는 힘은 시구詩句가 풍기는 향기
부드러운 언어와 숙달된 슬픔이 무기다
♧ 복사꽃 수평선 - 차영호
도로를 내로 바꾸고
차는 쪽배로 바꾸면
흐르고 흘러 닿을 수 있을까
무릉武陵
복사꽃 붉게 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젓대를 불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무릎을 베고 눕는 수평선
설익은 음률에도 바다는 파도를 파견하여 장단을 맞추고 추임새로
보구치 복복
성대는 분홍, 꽃분홍
복사꽃 풀풀 풀 흩어질 때
자꾸 뒤돌아보며 작별하는 어깨 너머
화개를 기약할 까닭들이 차곡차곡 쟁여진 고리짝이 있어……
내는 다시 도로로 바꾸고
쪽배를 차로 바꿔
밟아, 밟고 또 쌔려 밟으면 세월을 추월하여 먼저 닿을 수 있을까, 내년도, 후년도, 내후년도치
도원桃源
♧ 사막의 꽃 - 박종현
신발 살 능력이 없는 동물들은
신기하게도
제 살의 일부를 신발로 만들어 신는다
열사熱沙로 숙성시킨 가죽,
그 단단해진 발굽을 덧신기도 한다
뜨겁게 봉우리 맺힌 오후 등에다 지고 떠나는 걸음
길이 아득할수록 더 가벼워지는 건
사막 끝 신기루가 지어놓은 다락 높은
낙타의 집이 눈앞에 어른대기 때문만은 아니다
입가 비누거품처럼 피어나는 울음 머금은 바람
뚝, 한 떨기 떨어지면서
앞서 간 발자국에 고인 하루를 익힌다
낙타의 눈물이 꽃으로 벙그는 순간이다
발굽 닳은 신기루 한 채 머금은 꽃대 하나
장엄하다
♧ 화두 - 김미외
의자에 놓인 엉덩이와 결합한 시간이
혼합, 운반, 타설, 다짐, 양생의 공정을 가진
콘크리트로 굳어간다
시쓰기의 거푸집 채우기는
늘 아득하고 멀기만 한데
초록 숨 쉬는 씨앗 하나
핵으로 박혀 있기나 한지
문득
거품에 담긴 혼돈을 마시고 싶다
♧ 유산균을 지닌 문장
굽이치는 용심은 잠들지 않는 바다
물결치는 내 문장은
깊은 속 한 켠에서
통증을 일으키는 유해한 위선을 걸러내고
갑질의 오만을 잘라내고
옹이진 우여곡절을 녹이는 유산균이다
돌아본다
얼룩진 흔적
찰나마다 일어난
물결 굽다
명쾌하지 못한 낱알들 들깨같이 까맣다
내가 나를 위무하는 종이 위
유산의 문장들
씨줄과 날줄 드나든 자리
버티는 선에 참이라는 인장을 누른다
미혹의 노여움을 삭이는 유산의 문장들
갱물 들지 말기를
참이다 말하는 내가 참으로 참일 수 있어 나를 칭찬할 수 있도록,
♧ 눈사람 - 최선준
아이라인이 지워지고
콧날이 허물어지고
입술의 도톰함마저 짓물러져
녹아내리는 것이
사랑이라면
난, 겨울에 살 겁니다
기꺼이 봄을 포기할 겁니다
♧ 내 마음 풍선처럼 부풀어라 - 민문자
내가 사랑하는 후배
중년의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구연동화와 시낭송을
멋스럽고 맛깔스럽게
아주 잘 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지
어느 날 갑자기 의사로부터
6개월 시한부 생명이라는 판정을 받고
실의에 찬 투병생활 일 년 후
휠체어를 타고 시낭송 대회에
출전한 모습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렸던지
그런데 오늘 아침에 들려준 목소리
낭랑한 그 목소리와 활동하는 사진
고귀한 생명 애착, 불굴의 투병생활
하늘이 도우셨나 기적이다
잘 물리치고 두 발로 선 모습 대견타
눈물이 난다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풍선이 된 마음은 어서 만나고 싶은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
그래 조금만 더 참자
나팔수가 되어 우선 기쁜 소식을 전하자
봄이 오면 반갑게 만날 수 있겠지
시사랑 노래사랑 100회 기념 무대에서 만나자
그대의 재기 무대가 될 거야
구로아트벨리 대극장 봄무대에 세워
제2의 인생 시낭송가의 꽃으로 활짝 피우리라
♧ 믿음 - 이윤진
부질없는 세상 얘기도
즐겁게, 유쾌하게 웃어준
담장 아래 목련화
가는 세월 마다 않고
하얀, 하얀 마음으로 그저 웃는다.
도시집의 손님마냥
혼자여도, 둘이여도
단아하게 피어오른 바른 얼굴
언제나 화락하고 조용하다.
*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시詩』 2월호(통권 제368호)에서
* 사진 : 요즘 곶자왈에서 한창 향기를 풍기는 자연산 백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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