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시詩' 2월호의 시(1)

김창집 2019. 2. 12. 17:39


시인의 자존심 - 정일남

 

시인이라고 기죽어 살 순 없다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가난을 자처한 것이 죄가 될 수 있지만

시를 쓴다고 감옥에 보낼 법조문은 없다

가슴 펴고 얼굴 들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시에 매진하는 것이 손에 잡히는 게 없지만

영혼에서 건져 올린 광채

미지에 해바라기 왕국 하나 개척한다고 생각하라

고개 숙이고 풀 죽어 살지 말고

물질과 권력을 쥔 사람과 맞서서

시 한 수로 이긴다고 생각하라

 

권력을 이기는 힘은 시구詩句가 풍기는 향기

부드러운 언어와 숙달된 슬픔이 무기다

   

 

 

복사꽃 수평선 - 차영호

 

 도로를 내로 바꾸고

 차는 쪽배로 바꾸면

 흐르고 흘러 닿을 수 있을까

 

 무릉武陵

 

 복사꽃 붉게 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젓대를 불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무릎을 베고 눕는 수평선

 

 설익은 음률에도 바다는 파도를 파견하여 장단을 맞추고 추임새로

 보구치 복복

 성대는 분홍, 꽃분홍

 

 복사꽃 풀풀 풀 흩어질 때

 자꾸 뒤돌아보며 작별하는 어깨 너머

 화개를 기약할 까닭들이 차곡차곡 쟁여진 고리짝이 있어……

 

 내는 다시 도로로 바꾸고

 쪽배를 차로 바꿔

 

 밟아, 밟고 또 쌔려 밟으면 세월을 추월하여 먼저 닿을 수 있을까, 내년도, 후년도, 내후년도치

 

 도원桃源

   

 

 

사막의 꽃 - 박종현

 

신발 살 능력이 없는 동물들은

신기하게도

제 살의 일부를 신발로 만들어 신는다

열사熱沙로 숙성시킨 가죽,

그 단단해진 발굽을 덧신기도 한다

뜨겁게 봉우리 맺힌 오후 등에다 지고 떠나는 걸음

길이 아득할수록 더 가벼워지는 건

사막 끝 신기루가 지어놓은 다락 높은

낙타의 집이 눈앞에 어른대기 때문만은 아니다

입가 비누거품처럼 피어나는 울음 머금은 바람

, 한 떨기 떨어지면서

앞서 간 발자국에 고인 하루를 익힌다

낙타의 눈물이 꽃으로 벙그는 순간이다

발굽 닳은 신기루 한 채 머금은 꽃대 하나

장엄하다 


 

 

화두 - 김미외

 

의자에 놓인 엉덩이와 결합한 시간이

혼합, 운반, 타설, 다짐, 양생의 공정을 가진

콘크리트로 굳어간다

시쓰기의 거푸집 채우기는

늘 아득하고 멀기만 한데

초록 숨 쉬는 씨앗 하나

핵으로 박혀 있기나 한지

 

문득

거품에 담긴 혼돈을 마시고 싶다

   

 

 

유산균을 지닌 문장

 

굽이치는 용심은 잠들지 않는 바다

 

물결치는 내 문장은

깊은 속 한 켠에서

통증을 일으키는 유해한 위선을 걸러내고

갑질의 오만을 잘라내고

옹이진 우여곡절을 녹이는 유산균이다

 

돌아본다

얼룩진 흔적

찰나마다 일어난

물결 굽다

 

명쾌하지 못한 낱알들 들깨같이 까맣다

내가 나를 위무하는 종이 위

유산의 문장들

씨줄과 날줄 드나든 자리

버티는 선에 참이라는 인장을 누른다

 

미혹의 노여움을 삭이는 유산의 문장들

갱물 들지 말기를

참이다 말하는 내가 참으로 참일 수 있어 나를 칭찬할 수 있도록,

     

 

눈사람 - 최선준

 

아이라인이 지워지고

콧날이 허물어지고

입술의 도톰함마저 짓물러져

녹아내리는 것이

사랑이라면

 

, 겨울에 살 겁니다

 

기꺼이 봄을 포기할 겁니다

   

 

 

내 마음 풍선처럼 부풀어라 - 민문자

 

내가 사랑하는 후배

중년의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구연동화와 시낭송을

멋스럽고 맛깔스럽게

아주 잘 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지

 

어느 날 갑자기 의사로부터

6개월 시한부 생명이라는 판정을 받고

실의에 찬 투병생활 일 년 후

휠체어를 타고 시낭송 대회에

출전한 모습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렸던지

 

그런데 오늘 아침에 들려준 목소리

낭랑한 그 목소리와 활동하는 사진

고귀한 생명 애착, 불굴의 투병생활

하늘이 도우셨나 기적이다

잘 물리치고 두 발로 선 모습 대견타

 

눈물이 난다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풍선이 된 마음은 어서 만나고 싶은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

그래 조금만 더 참자

나팔수가 되어 우선 기쁜 소식을 전하자

 

봄이 오면 반갑게 만날 수 있겠지

시사랑 노래사랑 100회 기념 무대에서 만나자

그대의 재기 무대가 될 거야

구로아트벨리 대극장 봄무대에 세워

2의 인생 시낭송가의 꽃으로 활짝 피우리라

   

 

 

믿음 - 이윤진

 

부질없는 세상 얘기도

즐겁게, 유쾌하게 웃어준

담장 아래 목련화

가는 세월 마다 않고

하얀, 하얀 마음으로 그저 웃는다.

도시집의 손님마냥

혼자여도, 둘이여도

단아하게 피어오른 바른 얼굴

언제나 화락하고 조용하다.

 

 

            *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시2월호(통권 제368)에서

                 * 사진 : 요즘 곶자왈에서 한창 향기를 풍기는 자연산 백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