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용진각의 가을 풍경

김창집 2019. 10. 31. 22:34


가을은 그렇게 온다 - 草岩 나상국

 

불볕더위와 열대야로

 

숨이 턱턱 막히던 그 징한 여름

 

그나마 숨통을 열어주던

 

선풍기 바람도

 

바람나 조강지처 버리듯

 

쪽방으로 밀어낸

 

가을바람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울긋불긋 노랗게

 

풍성하게 발맞춰서

 

가을은 그렇게 온다

 


섬잔대 - 김순남

 

먼 길을 혼자 가시려구요

무지개 발 담그고 있는 샘물을 마시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삼각봉이 왕관능을 바라보듯이

왕관능이 삼각봉을 쳐다보듯이

두고두고 그리워하다

산 이슬 몰래

맑은 종소리로 오시는 그대여

 

사랑 마을에 저녁연기 피어나면

그 때는 탑동바다

마음껏 흔들어 깨워도 좋습니다.

    

 

 

산 사람은 소주를 마신다 - 권경업

 

슬픔이 흐르던 산

기쁨이 일어나던 산

그리운 산 그리운 님

못내 그리다가

도회의 뒷골목

옛 산친구를 만나

어느 선술집 쪽탁자에서

노가리목 비틀어 잡고

그리움을 달랠까

 

소주 싫어하는 산사람 없지

산쟁이 마음처럼 투명한 액체

마시는 만큼 솔직하게 취하는 술

슬픈 이야기에 슬퍼하고

기쁜 이야기에 기뻐하며

쪽탁자 모서리에 쌓여가는 빈 병

 

장구목 눈사태에 묻히고

설악골에서 동지의 주검을 메고

소주병 씻어 마시던 12

새벽녘 부채바위 밑에서

동문으로 술 사러 가도록

빈병 하나하나마다 취한

옛 이야기가

백두대간 종주하는

나그네의 발길에 채인다

 

---

*장구목: 제주도 한라산 용진각 대피소에서 윗세오름으로 오르는 길목의 고개.

*설악골: 설악산 비선대와 천화대능선 사이의 계곡. 겨울에 이곳에서 빙벽등반이 이뤄진다.

*12: 내설악 남교리에서 출발하는 12선녀탕계곡의 통칭.

*부채바위: 부산의 대표적 암벽훈련장. 금정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있다.

    

 

 

가을 나무 앞에서 2 - 김규중

 

  어느새 눈이 침침해 아침에 머리카락 몇 올 빠져 어깨에 떨어지고 이젠 에너지 하나로는 부족해 추위에 근육과 뼈가 오래된 침대처럼 소리하고 이젠 두 개의 위로가 필요해 돌아갈 수 없는 지나온 길, 어느새 중년. 어느 새 오십 중반, 살아온 만큼 여전히 살아가고 싶은 욕망, 모아 놓은 것이 아직도 아직도 나는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해

 

  가을 나무는 찾아갈 봄이 있어

  저렇게 나뭇잎을 버린다.

    

 

 

조릿대가 고산으로 간 이유 - 채원 강연옥

 

지구 온난화의 채찍질로,

 

제주 조릿대 군락이 한라산 고지를 향해 밀려 올라

가 땅을 뒹굴며 자라는 양지식물 시로미를 에워싸

숨통을 조이고 있다. 시로미는 고산의 비바람에

부딪히며 햇살에 제 몸 섞여야 까맣게 단물 들거늘

제 그림자 땅에 묻으려 잎새 비비는 조릿대에 눌

리어 실성하다 시들고 마는 현실, 아프고 서럽다

이제 시로미의 살길이란 척박한 돌밭에 기어오르

거나 더 추운 고지를 향해 허겁지겁 오르는 일 뿐.

더 이상 핏물 마를 것 없는

창백한 구상나무 고사목

굶주림의 상처인 냥

허연 뱀 껍질을 뒤집어 쓴 채

계절을 맞고 있고

백록담 분화구엔 영생의 꿈처럼

하얗게 서리가 내려도

돌매화는 의지의 입술 깨문 채

여위어만 간다

 

삶에 있어서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가?

 

들판을 휘젓고 다니며 꽃을 따는

애 밴 이유 모르는 백치 소녀처럼

정작 조릿대는 알지 못한다

고산으로 가게 된 이유를

    

 

 

등산 - 김희철

 

잊지 않겠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어리목에 이르렀다고 해서

백록담에 다다른 것도 아니고

내려갈 일도 있습니다.

산을 오르느라고

힘들었던 일은 잊고

지나온 일에

너무 매달리지 않겠습니다.

삼십 문턱을 넘어서

세상은 조금 보일지 모르지만

아직도 정상과

내려가는 일이 남았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오르는 것보다도

내려가는 것이 더 험하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라산 1 - 한기팔

 

나직이 울리는

구름의 말

풀잎의 말

그 아득한 곳의 물소리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은 몸으로

世上 귀 기울여 살려했는데

 

내게 이르는 모든 것

내게서 떠나는 모든 것

地平에 구름 모이면

의 원근(遠近)이 뚜렷한데

 

끝내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하면

산 하나를

마음으로 비운다.

    

 

 

백록담 김종원

 

  입이 없어 할말을 잊은 건 아니어라. 차라리 벙어리가 되고 싶은 남해의 고아여라. 고삐 풀린 구름 식솔 거느리고 멀리 대륙을 부르는 당신은 바로 하늘일 수도 땅일 수도 없는 천형(天刑)의 기다림이어라.

 

  이어도는 어데 있는가. 밤새도록 긴 목 뽑아 시린 눈 비벼봐도 이어도는 없구나. 오돌또기 저기 춘향 나오는 물질 땅 이어도는 없구나. 오백 나한 거느리는 고을나(高乙那)의 아들이어. 하강(下降)의 태자여.

 

  한 발 디뎌 못다 푼 시름 두 발 디뎌 정상에 오르면 새도 지쳐 아니 오는 하늘의 땅. 그것은 차라리 영겁으로 흐르는 국토의 젖줄이어라. 갈갈이 찢긴 한() 마파람으로 삭이며 구천(九天)을 맴도는 응어리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