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절기
나이는 내가 조금 더 많은 것 같고
한시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서로를 밀쳐내지는 못하고
갓 지은 밥처럼 수북하게 쌓인 어둠 갓 돋아난 새싹 낯선 등의 체온의 내 몸을 관통한다. 갑자기는 아니고
뜨거운 김이 훅 덮쳐올 때 어떤 방향으로든 계절은 연결된다.
우리는 지금 계절의 끝과 시작에 서 있다. 발효되지 못한 고백은 주저주저 첫 전화(轉化)를 시작하려 하고
어둠 속에서 오래 있다 보면 모든 게 환해진다. 나이만큼 아는 것이 많은 건 아니고
수북하게 쌓인 어둠은 얇은 잎이 된다. 위안이라면 위안이고
멀리서 계란장수가 득음한 듯 확성기를 틀며 지나간다. 꿈틀꿈틀 모든 게 합쳐지는 환절기
볼이 미어지도록 먹은 밥이 달다. 사랑한 적 없기에 뜨거운 고백도 없고
♧ 가을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가을이란 모름지기 뭐든지 떨어져야 제맛이란다.
가을엔 여하튼 떨어지게 되어 있다.
어깨를 타고 스쳐가는 어떤 전율을 느낄 때 앞서간 내 모든 것들과 밀회를 한다.
불모(不毛)의 가슴 속에, 오전이 지나고, 정오도 지나고, 저녁의 그늘 속에 내가 있다.
오, 참으로, 가을 햇살이 뜨겁네.
♧ 삽화
하늘에 빈자리가 생겼다. 그 후
구름과 바람과 비와 번개와 별과 달과 해와 같이 살던 새 한 마리가 없어졌다. 하나의 공백은 그렇게 시작했다.
가끔은 땅에 있다 오기도 했기 때문에 잠들기 전엔 없으리라 믿었다.
흰 눈 가득한 겨울이었고
별의 눈을 가진 새는 발끝에 맞닥뜨린 물고기들을 잡아 올리곤 했다. 바람을 닮은 날개로 새는 언제나 어제처럼 오래된 길로 돌아왔다.
새는 버릇처럼 하늘에 한 점을 찍고 날아갔을 뿐인데 점점 새의 빈자리는 태양처럼 동그랗고 붉게 커졌다.
뻔히 저기 있는 걸 알았으나 아득하게 사라진 새는 없는 날을 만나 돌아오지 않았다.
날카로운 얼음에 발이 베일 때면
밤이면 밤마다 내게 없는 나를 안고 자고 새벽을 시작할 때도 내게 없는 나를 안고 일어났다.
그때마다 새는 더 몰래 날아올라 돌아오지 않을 궁리를 했다. 그러면 나는 얼음을 깨트리며 모든 공백에 대해 다시 쓰기 시작했다.
♧ 사랑했던 기억만으로
숨은 것들이
숨겨진 것들 위로 포개진다
존재했던 자신의 흔적을 찾아 떠도는 유령처럼
불변자여 이유가 무엇입니까
꽃은 봄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도 가을엔 함부로 떨어져요 완벽하게 조화로운 혹은 완전하게 맹신적이게 떨어지는 게 파괴적이고 미련한 사랑에 대한 공멸 같아요 그 뒤에는 근사하게 뒤얽힌 두 발자국이 길게 굽어 있겠지요 거짓말처럼 환하게 숨겨진 것들을 껴안을 수 있기에 삼생(三生)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릴 거예요
우-후후 피고지고피고지고피고
덜 말해야 더 말할 수 있는 기억이 초라한 꽃잎처럼 차곡차곡 내게 쌓인다
불변자여
얼마큼 오셨습니까
♧ 오류의 정원
정작 멈추지 않는다. 어둠의 수많은 바람은.
이곳은 오류의 정원,
빈틈이 많은 돌담을 따라가면 돼. 한아름 독백을 생산하던 날처럼 나는 변절하고 싶어. 세상 어딘가에서 딱 90일만 살아보고 싶어. 슬픔 주의보가 헛헛하게 날리던 날, 한라산은 시퍼렇게 얼어서 무서웠지. 새들은 날개가 있는데도 왜 섬을 떠나지 않을까. 내 안에 숨지 않게 죽어도 좋아.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거 구경하고 오래오래 살고. 나를 찾아서 지구의 지루한 여행자가 될 거야. 좀 더 일찍 나를 읽어내길 바라. 바다는 한참을 비관적이더니 메아리도 없이 고요해. 보통이어서 더 철석같이 믿은 시간이 지나가. -모든 슬픔의 척추신경절은 교인도 아니면서 바다에 푹 담겼다 나왔다. 묻는다. 이게 과연 가당키나 한가?- 세상이 온통 죽음이야. 안녕. 이젠 잊기로 하자. 죽음을 지르밟고 제발 뒤돌아보지 말자고 노래를 부르는 나는. 지금 다 털어버리고 말리라.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런데 바람은 왜 광기를 부리듯 나를 휘감아 소용돌이칠까. 겨우 3억 광년 떨어져 할 수 있는 거라곤 바닷가에 나를 켜켜이 쌓아놓는 것뿐. 끊임없이 날 휘감아 도는 바람에 나는 즐거운 실어증을 앓고 있어. 바람을 잠재울 마음이 없어. 봐봐. 바다가 아름답게 팽창하고 있어.
*안은주 시집『오류의 정원』(시인동네 시인선 094,2018)에서
*사진 : 10월 29일 성읍2리 입구 메밀꽃 행사장에서
'아름다운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순란 시집 '순데기'의 시들 (0) | 2019.11.11 |
---|---|
양순진 시집 '노란 환상통'의 시 2 (0) | 2019.11.07 |
용진각의 가을 풍경 (0) | 2019.10.31 |
권경업 시인의 가을시편과 단풍 (0) | 2019.10.28 |
'제주작가' 66호의 기획 시 (0) | 2019.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