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양순진 시집 '노란 환상통'의 시 2

김창집 2019. 11. 7. 20:59


파문

 

  사유는 경계를 넘는다*

  지렁이처럼 습지를 사유하던 시간들이

  그 경계를 넘어 식물성이 되어가던 찰나

  식물의 살갗 속으로 손가락이 눈물을 묻는다

 

  충분히 외로웠던 시간이 제로로 사그라질 때 꽃시장에서 입양해온 아이들의 이름을 되뇌인다 백모단 성미인 사과불꽃축제 흑법사 레티지아…… 오늘밤 다육과의 동침은 살을 나눠주는 향연이기도 해서 서로의 무늬를 엿보는 일처럼 파문 인다

 

  파문이란 안에서 안으로 퍼져 나르는 떨림이기에 그 가장자리에 닿는 울림만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갇혀버린다

 

  식물의 피가 흐르는 밤

  사유는 단단한 행성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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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 묘비에 새겨진 글귀

    

 

 

노란 환상통 1

  -망고홀릭에서

 

망고가 열린 해변에서

가장 노랗게 익은 시절을 딴다

 

몽유병 같은 치명적 시간은

매번 아찔했으므로

몽상의 해변에 뿌렸다

 

섬처럼 치솟은 망고나무는

갖지 못한 사랑의 환생이므로

심야에만 가슴을 여는 불구의 환상통

 

둥글어지던 마음이

초승달로 깎이며 기울어 갈 때

잠자던 악어들이 뭍으로 올라와

설익은 망고 캔버스에 노란 배 띄운다

 

몽유병 같은 사랑을 버리자

발작하던 환상통

수면에 가라앉는다

노랗게 울던 시절이

지독한 악몽처럼 지나갔다

 

이미 예고된 낙과였으므로

가장 달콤한 망고 타고

한 시절의 오브제를 떠난다

 

나는 망고의 시간 누렸으므로

죽음처럼 잊혀져도 무관하다

    

 

 

로스구이

 

뜨겁게 달군 철판 위에

당신을 눕혔지요

잘 구워진

당신의 가슴살을,

허벅지살을 엉덩이살을

뜯었어요

아무 미련 없이 꿀꺽 삼켰어요

당신 가슴엔 사랑이

허벅지엔 굴욕이

엉덩이엔 슬픈 허밍이

불타고 있었거든요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많이 먹어 댔죠

사랑은 사랑을

먹어도 먹어도

허기짐보다 슬픈 공허함

바닥난 사랑을 긁어 대는 소리는

숟가락으로 양푼 긁는 것보다 슬퍼요

메아리도 없데요

오히려 눈물이 나데요

연기 탓만은 아닐 거에요

사랑이 새카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꿀꺽 삼켜버린

당신

 

불판 위엔

여운도 없네요

    

 

 

냉소적 담론

 

  다시는 내 생애 반복법 쓰지 않겠다 운명을 거래하는 내게 사소한 갈등들이 거미줄처럼 얽힌다 우연을 필연으로 오인했던 수많은 거짓말들이 단단한 유리문 만들어 버렸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 반복의 횡포는 잡초처럼 자란다 그 뾰족한 풀칼에 긁혀 상처는 무디어지고 나쁜 영화 관람처럼 눈알이 뻣뻣하다

 

  다시는 내 시에 반복법 쓰지 않겠다 반복은 상징의 결여로 인식되므로 제자리에 들어서지 못하는 낱말은 빛을 잃는다 호사로 시를 배운 당신처럼 구멍 난 가방 메울 수는 없는 법 은유의 비밀 캐려고 수억 광년의 별 헤매는 나에게 이중성은 변조다

 

  지나간 치욕 잊어버린들 당신의 본성 갈아엎을 수 있을까 포장된 진실의 껍질 벗겨냈을 때 향유할 그 무엇도 없는 사막이었지 복구하기 힘든 불신 유리문에 중첩되고 나는 쓰레기처럼 하찮아졌다

 

  다시는 내 문장에 반복법 쓰지 않겠다 여우가 둔갑하고 눈보라 삽시간에 휘도는 극한에도 유일하게 끌어안던 문장은 결국 가짜였고 지독한 함정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열고 닫는 유리문은 이제 철폐한다 그 얄팍한 혓바닥으로 은유의 세계를 관통하지 말라는 경고가 우리 담론의 결말

 

  한계란 지속이 아니라 절멸임을 다시 한 번 밝힌다 환상의 색안경 벗으니 비로소 하늘이 열린다

    

 

 

매미

 

네가 내 안을 관통한 후

아무도 이 나무에 앉지 않는다

 

네가 내 안에서 울기 시작하면

내 몸엔 비로소 멈추었던

수액이 흐른다

 

아무리 당찬 다른 종족의 구애를 받지만

도저히 잎과 줄기가 미동하지 않는다

가장 격하게 흔들렸던 기억만이

나무의 흐름

 

그 자리에 박혀 서서

오직 그대가 날아와 울어 주기만을 바라는

환몽의 나무

아직 온몸 푸르러, 노랗게 물들기 전

한 번 더 격하게 흔들렸으면

      

                      *양순진 시집노란 환상통(책과 나무,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