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과 계절 사이
연탄불 탁자에
명함과 술병이 스러져 있고
새들이 철 따라 날아들었다
하늬바람과 마파람의 간극을 쫓아
회오리가 감장돌 때
지하철 객실에 꽉 찬 사람들
이어폰으로 세상을 등지고 있다
퍼런 사이렌 소리가 도시를 삼킬 듯이 울어대고
철 잃은 살모사 떼들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아스팔트 위에 엉키었다
썰물과 밀물 들고 날 때
취직 준비하던 젊은 친구가 배낭 둘러메어
회오리 기둥 사이로 사라지던 날
느리게 돌아가던 시곗바늘마저 지쳐 쓰러졌다
산책 나온 진돗개 뒷다리 붙잡은 진드기
질긴 가죽 헤쳐 달착지근한 피 빨아먹고
잠깐 조는 사이
뒷발로 긁다 못한 개의 이빨이
통통한 진드기를 씹어 제 피를 핥았다
연탄불 탁자에 아무렇게나 놓인
명함과 술병을 삼켜버린 술 취한 철새들
높새바람 따라 날아가 버렸다
♧ 빗자루
쓸어내리며 살았다
마당에 떨어진 낙엽처럼
가볍게 흘려버린 내 기억들
빗자루로 가볍게 쓸어 담으며 살았다
시집살이 서러움으로
부서져 버린 시린 가슴
빗자루로 주워 담으며 살았다
어린 자식 끼닛거리 빈약할 때
텃밭 구석구석 휘저으며
가난한 주머니 빗자루로 밀쳐내며 살았다
쓸어 모으며 살았다
한 자 두 자 조각난 문장들
숨어버린 단어를 빗자루로 쓸어 모으며 살았다
한 편 두 편 조잡한 습작들
빗자루로 쓸어 담아 두었다
♧ 숲을 지키는 나무
초목이 납작 엎드린 날 바람으로 가지마다 열매를 품었던 과목들은 더 낮게 엎드리어 숨을 죽였다. 지붕 위로 키 자랑을 하던 숙대낭은 엎드리지 못해 울부짖었다. 바람도 울부짖으며 숙대낭을 쓰다듬었다. 비수를 뽑아 제 팔을 잘라내고 수염조차 밀어내며 바람을 마주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알고 영역표시도 못 하고 지린 오줌을 핥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밀짚모자
바람이 수탈해 간 빈 밭을 돌아보며 한숨으로 밭담을 다독거렸다.
시치미를 떼면서 나타난 맑은 하늘
성난 파도를 어루만지며 수평선을 지켜주었다.
산에서 불어온 바람
밭에서 춤추고 바다에 잠들었다.
그해 봄
원주민들이 내세운 추장은 산신제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해 여름
불타는 가뭄으로 목마른 여름을 보냈다.
그해 가을
연달아 내리는 비에 바람이 성났다고 했다.
그해 겨울
원주민들은 촛불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 김순란 시집『순데기』(파우스트, 2018)에서
* 사진 : 어제(11.10) ‘돌오름길’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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