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김순란 시집 '순데기'의 시들

김창집 2019. 11. 11. 16:53


계절과 계절 사이

 

연탄불 탁자에

명함과 술병이 스러져 있고

새들이 철 따라 날아들었다

 

하늬바람과 마파람의 간극을 쫓아

회오리가 감장돌 때

지하철 객실에 꽉 찬 사람들

이어폰으로 세상을 등지고 있다

 

퍼런 사이렌 소리가 도시를 삼킬 듯이 울어대고

철 잃은 살모사 떼들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아스팔트 위에 엉키었다

 

썰물과 밀물 들고 날 때

취직 준비하던 젊은 친구가 배낭 둘러메어

회오리 기둥 사이로 사라지던 날

느리게 돌아가던 시곗바늘마저 지쳐 쓰러졌다

 

산책 나온 진돗개 뒷다리 붙잡은 진드기

질긴 가죽 헤쳐 달착지근한 피 빨아먹고

잠깐 조는 사이

뒷발로 긁다 못한 개의 이빨이

통통한 진드기를 씹어 제 피를 핥았다

 

연탄불 탁자에 아무렇게나 놓인

명함과 술병을 삼켜버린 술 취한 철새들

높새바람 따라 날아가 버렸다

    

 

 

빗자루

 

쓸어내리며 살았다

 

마당에 떨어진 낙엽처럼

가볍게 흘려버린 내 기억들

빗자루로 가볍게 쓸어 담으며 살았다

 

시집살이 서러움으로

부서져 버린 시린 가슴

빗자루로 주워 담으며 살았다

 

어린 자식 끼닛거리 빈약할 때

텃밭 구석구석 휘저으며

가난한 주머니 빗자루로 밀쳐내며 살았다

 

쓸어 모으며 살았다

 

한 자 두 자 조각난 문장들

숨어버린 단어를 빗자루로 쓸어 모으며 살았다

 

한 편 두 편 조잡한 습작들

빗자루로 쓸어 담아 두었다


    

  

숲을 지키는 나무

 

  초목이 납작 엎드린 날 바람으로 가지마다 열매를 품었던 과목들은 더 낮게 엎드리어 숨을 죽였다. 지붕 위로 키 자랑을 하던 숙대낭은 엎드리지 못해 울부짖었다. 바람도 울부짖으며 숙대낭을 쓰다듬었다. 비수를 뽑아 제 팔을 잘라내고 수염조차 밀어내며 바람을 마주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알고 영역표시도 못 하고 지린 오줌을 핥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밀짚모자

  바람이 수탈해 간 빈 밭을 돌아보며 한숨으로 밭담을 다독거렸다.

  시치미를 떼면서 나타난 맑은 하늘

  성난 파도를 어루만지며 수평선을 지켜주었다.

  산에서 불어온 바람

  밭에서 춤추고 바다에 잠들었다.

 

  그해 봄

  원주민들이 내세운 추장은 산신제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해 여름

  불타는 가뭄으로 목마른 여름을 보냈다.

 

  그해 가을

  연달아 내리는 비에 바람이 성났다고 했다.

 

  그해 겨울

  원주민들은 촛불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 김순란 시집순데기(파우스트, 2018)에서

           * 사진 : 어제(11.10) 돌오름길의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