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에 상고대 핀다는 소식은
12월이 되면서 벌써 들려왔지만
정상에는 아무렇게나 갈 수 없는 곳이라
쉽게 빨리 보고 오려면
1100도로나 어승생악에 가는 게 좋다.
그러나 상고대는 춥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빛나는 상고대가 형성된다.
우선 과냉각된 즉 갑자기 기온이 내려
빙점 이하의 작은 물방울이
공기 중에 떠돌다가 나뭇가지 같은 것에
붙어 얼면서 불어난 것이기 때문에
공중이나 습지에서 떠오르는
과냉각된 물방울이 만들어져야 한다.
서리와도 구별이 되는데,
어떤 곳에서는 아래 풀밭 같은 데는
서리가 내려앉고
위의 나무에는 상고대가 피어
더 멋진 풍경을 연출하게 될 때가 있다.
♧ 상고대 - 채홍조
우유 빛 안개 피어오르는 날
하늘과 땅이 하나되어
구름 속에 서있는 듯
순백의 세상 속으로 빨려든다
서리꽃 눈부신 면사포 쓰고
선잠 깨어나는 소나무아래
연미복 차려입은 까치들
해 맑은 노래
푸새 위에 은빛으로 반짝인다
갈참나무 잎
바삭거리는 산길 따라
대 숲을 흔드는
한 무리 박새, 재재거리며
은도금한 하얀 숲 속으로 녹아든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고개 숙인 억새 헝클어진 머리
삭아 주저앉은 관절마다
바래 서걱이며 부러진 날개 위에
서럽도록 아름다운 별빛으로 내린다
♧ 상고대 - 제산 김대식
눈이 온 것도 아닌데
비가 온 것도 아닌데
밤새 찬바람에 물기 조금 스치고 지났을 뿐인데
가지마다 상고대
저렇게 하얗게 맺혔을까?
이미 말라 버린 앙상한 마른 가지
푸른 잎 하나 없는 메마른 냉가슴
따뜻한 남풍은 떠난 지 오래였고
삭막한 북풍만 서성였는데
깊은 정 나눈 것도 아닌데
눈물 나게 울며 이별한 것도 아닌데
그냥 오가며 눈인사 정도 했을 뿐
그런데 왠 그리움?
가지마다 상고대
저렇게 눈물처럼 맺혔을 줄
♧ 상고대 - 草岩 나상국
바람의 흐느낌도 서투른
상실의 계절
힘차게 내던진 릴 낚싯줄 끝
팽팽하게 당겨지는 신경전
감았다 풀었다
저 멀리
발가벗고 목욕하며
애간장 태우며
들며 나며 입질하던
하얗게 꽃핀 월악산 잔설이
낚이어 올라온다
오래전 삶의 터전
수몰당해 쫒겨난
수심 깊이 수장된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수양게 마을
제원군 한수면 명오리
선사유적의 골동품
동안거에 든 돌부처처럼
연신 당겨보아도 낚시를 물고
놓지를 않는다.
♧ 상고대 - 권오범
나목들 가장이 붙잡고
밤새 신음하도록
희롱했을
동장군 끄나풀들
모락모락 허비되는 오르가슴 채뜨려
하얀 옷 지어 입혔는지
벚꽃보다 더 눈부시게 태어난 백색터널이
저승같이 고요하다
햇볕 추궁에 글썽거리다
금세 후드득후드득 벗어던져
이실직고하고야 말
바람과의 하룻밤 풋사랑일지라도
♧ 상고대 서리꽃 - 김종제
당신의 창문을 열고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니
세상의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꽃을 가졌다
하늘 아래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선물을 가졌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안개나 구름이 미끄러져
영하로 급강하 추락하다가
서리나 이슬이 되어
사랑으로 엉겨 붙었다
바닷속 예쁜 산호꽃이 피었다
상고대라고 불리는 꽃
눈으로 볼 수 있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특별하고 값 비싼 마음을 가졌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희망의 수다를 떨면서
이야기꽃이 활짝 피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로 닮아있는 겨울산이
북극의 곰처럼 순하고 맑다
상고대 서리꽃 피는 것이란
찬 기운에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 맞대고 앉아
마음 뭉쳐지는 일이다
주검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자리 같이 하면서
힘이 되어 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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