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이 – 강영순 오색약수터 위로 만경대 오르는 긴 골짜기 물은 맑고 맑아 산천어 속까지 다 보이는데 맑은 물에 비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저 모습 고목 둥치 다 썩어 허물어진 속살에 썩지 않은 옹이 송곳같이 비수같이 삭아진 속살 안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네 내 삶의 여한일까 남에게 심은 응어리일까 오르는 발걸음 내려오는 마음 갈피 맑은 물에 비친 마음 보고 또 보며 천지 어디에도 모진 옹이 남기지 않으면서 맑은 물 위로 떠가는 단풍잎처럼 가벼이가벼이 흘러가기를 깊은 산속 저무는 가을 간절한 나의 기도 ♧ 겨울아침 - 김귀녀 까치 울음에 눈을 떴다 며칠 남지 않은 한 해가 아쉬운가. 온 몸이 무거워 벌떡 일어나지질 않는다 밤사이 눈이 내렸는지 대문간에서는 눈가래 끄는 소리가 들린다 눈길을 내는 동안 나는, 박 박 쌀을 씻어 늦은 아침을 앉힌다 현관문을 열고 밖을 본다 문 여는 소리에 놀랐는지 모과나무 위에서 아침 햇살을 맛보던 참새 몇 마리 포르르 싱그럽게 마늘 밭으로 내려앉는다. 핼쑥한 햇살더미와 함께 나도 하품을 털어낸다 ♧ 나목 - 김내식 이 세상에 부귀영화 화려하게 꽃 피워도 한 순간에 떨어지는 잎새 같은 것 삭풍에 몸을 떨며 침묵으로 외치는 너의 모습이 애처롭고 아름답다 삶의 시작도 허무의 점찍고 가는 종말도 잎새 하나 없는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고 벗은 몸으로 외치는 진리의 전도자 말 못하는 만물이 무지한 인간을 깨우치고 있다 ♧ 겨울나무 곁에서 – 김청광 겨울하늘이 가을하늘보다 푸르다 옷깃 여미며 산을 오르면 유리벽처럼 다가서는 차가운 하늘 눈썹 떨리는 날 선 하늘아 지상의 나무들을 보아라 가슴 저미며 떨고 있는 목숨들 위에 눈이라도 함박눈 푸근히 덮어줬으면 발가벗은 겨울나무 한겨울 푸른 하늘이 너무 시리다. ♧ 하나 되다 – 김학순 눈 오는 날 산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군중 속 아우성은 구렁으로 빠져들고 하늘 산 길 모두 다름이 사라져 도란도란 하얀 꽃 피우기 분주하다. 하늘로 오름인가 온 세상 하얀 마침표 하나 콕 찍는다. ♧ 고향 산청 지리산 - 민수호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리산 산청군 지리산이 무슨 요새인가 6․25전쟁 전후하여 김일성 부대도 천왕봉에 텐트를 쳤고 국군11사단 9연대도 텐트를 쳤고 견벽청야 작전으로 벽을 쌓아 빈 들판 만들어 죄 없는 양민, 농민들 700여 명을 죽였고 할아버지는 국군의 정조준 총에 맞아 억울하게 산화 하셨는데, 할아버지 등에 업혔던 10개월 어린이 나는 어떻게 살아났는지? 생존 역사 스토리가 단절 되었다 생시에 아버지도, 어머님도 아무런 이야기도 해 주시지 않았다 짐작한다 그 끔찍한 추억을 기억하기 싫었을 것이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하셨으리라 아, 고향 산청 지리산은 질곡 애환의 함성들이 지리산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눈 부릅뜨고 있구나 오직 지리산 역사만이 알고 있는 지리산 너만이 알고 있는 갈등의, 용서의 끝을… ♧ 겨울나무에게 – 유정 모든 것을 비우고 찬바람에 홀로 선 독신이여. 모든 욕망을 비워 다가오는 새봄에 거듭 푸르게 푸르게 일어서는 너의 말 없는 의지여. ♧ 겨울나무 2 - 이인평 살다 보니 나도 내 것이 아니더라 무엇을 위해 이토록 살았던가 찬바람 속에서도 열심히, 아주 열심히 살았지만 알고 나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더라 살과 뼈를 웅크리며 안간힘을 다해 버텨도 얼어붙는 몸 혹한 속에서도 죽은 다음까지도 내게 남아 있어 줄만 한 희망 하나 찾아 품는 것 동장군을 물리치고도 남을 오직 희망 하나를 품에 사는 것이더라 ♧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 최상호 겨울산 봉우리에 올라서면 면면히 뻗은 산줄기와 흔들리는 저 적송의 가지에서 그대의 혼 느낄 수 있다 먼 옛날 그대의 행적일까 감발도 못한 발로 수없이 밟았던 산천고을 버리지 못할 운명으로 이 땅 쓰다듬다가 역적에 몰려 태장 맞은 그 아픔이 갈맷빛 골짜기에 푸르게 넘쳐오고 고산자여 찬바람 시린 겨울산 언덕에 서면 소나무 껍질마냥 갈라진 그대의 손바닥이 다가온다 * 계간『산림문학』2019년 겨울(통권 3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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