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익은 박주가리 열매는
유난히 춥고 바람이 센 날을 골라
제 몸을 열고
씨앗을 날려 보낸다.
분신分身과 같은 씨앗들이
볕바르고 기름진 땅으로 멀리멀리 날아가
뿌리를 내리고
천년만년 자손을 번성시키며 살라고
기원하듯 가슴을 연다.
하필이면 추운 날씨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을 골라
바람으로 바람의 벽을 두드린다.
다시 손에 잡힌 시집
월간 ‘우리詩’ 12월호에서
시 몇 편을 골라
박주가리 씨앗에 실어 보낸다.
♧ 바람은 스스로 집을 허문다 – 나병춘
나무 그림자는 실은
이 세상에 짓지 못한
바람의 방이다
오랜 여행으로 지친 바람의 등을 보아라
나뭇잎 사이사이 파고드는 빛 강물의 일렁임 따라
바람은 수시로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걸어 아늑한 창틀을 만든다
바람의 방을 엿보는
햇살 시선은 느껴본 자만이 알리라
정자나무 그늘 아래 낮잠을 청하면
꿈길에 언뜻언뜻 들리는
어린 새소리
바람은 우지끈 뚝딱 처마를 허물어
조각구름 한 자락 끌어당긴다
밤이 오면 그림자의 창은 어딘가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다
나무 기둥만 남겨 놓은 채
먼 마실로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그림자는
밤마다 듣도 보도 못한
우주 자궁 속으로 들어가
짠하고 어기찬 바람의 뼈들을 수습해온다
♧ 구순 노모의 눈 – 김승종
오후 늦어 낮잠에서 깬 구순 노모가
침침한 눈으로 나를 이윽히 살피다가
에그 너도 이제 늙었구나 한다
아 어머니 그래요 소자도 이제 늙었나요
게으르게 늙었나요
번개처럼 후회하고 천둥처럼 비탄하네
화끈거리는 온몸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예감하였던 예정이지
구순 노모는 탄식조로 말을 잇는다
눈도 쳐지고 입가에 주름도 지고
북받치는 심장이여 그래 나는 재개한
달리기를 계속할 것이다 견딜 만한
고통을 꿈꾸던 한때 나를 추억하고 혐오하면서
발바닥이 터지고 무릎이 닳도록 한밤에 달리리라
구순 노모가 나를 보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 한밤에 나는 무슨 짐승처럼 달리고 달리리라
♧ 프로젝트 오메가Project Omega - 정옥임
언 땅이 오므렸던
허파를 쩍 벌려
세상 열기를 모두
빨아들이는 한겨울
췌장 말기 암
갑상선까지
도려낸 십 년 전부터
언제 녹을지 모르는
눈사람으로 조마조마 살다가
병이 재발하여 또 병원
이번에는 십이지장
위 몽땅 떼 내고
남은 췌장 직통 연결
더 가벼워진
2차 눈사람이 되어
오뚝이처럼 또 살아났다
“이번에도 녹을 때가 아닌 거야!
간장 심장 폐와 뇌가 싱싱하잖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하니 좀 더 살아.”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일으켰다.
♧ 터럭 - 이화인
소소한 일로 부부싸움에 밤새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아내를 바라본다
돌이켜보니, 원인은 나였다
문득, 아내 속가슴에 박혀 있는 터럭 하나
전생에 심어놓고 미처 뽑아주지 못한
아내의 생살을 먹고 자란 작은 터럭 하나
먼 훗날 가시가 되고 날 선 비수가 될
다음 생에서 들보만큼 자랄 터럭 하나
♧ 혼자 먹는 밥 – 김 완
점심시간 구내식당에 가면 볼 수 있다
왁자지껄 어울려 밥을 먹는 무리 사이
묵묵히 혼자 밥을 먹는 사람 있다
어울려 먹는 밥이 최고인 것을
부득이 혼자 먹게 되는 밥도 있다
거짓과 기만이 난무하는 밥보다
정직하게 외로움과 함께 먹는 밥이 낫다
밥상에 별이 뜨고 울음이 피어오른다
외롭지만 서슬 푸른 영혼이 되리라
살아있는 모든 것은 본래 혼자일 뿐이다
풍경처럼 새 한 마리 하늘로 날아간다
♧ 무명화가 – 권기만
무얼 그리려던 것일까 만지면 물감이 번진다 저렇게 많은 붓을 들고 봄부터 가을까지 연습만 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 대상을 그리지 않고 대상이 되는 까닭에 자신이 화가라는 것마저 잊고 있다 내려 긋지 못하는 붓 속에 불과 눈동자가 있다 작품은 그리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흔들리는 거라며 붓을 다 던져야 완성되는 한 폭의 나목, 그가 그린 건 자신의 초상화다 한 번만 쓰고 버린 붓을 줍는다 단숨에 휘두른 붓을 따라 허공이 울긋불긋 웃는다 바스락거려도 물감이라는 건지, 막무가내 번진다 물감 한 통 뒤집어쓸지 모르므로 멀찌감치서 바라보고 가는 사람들, 물푸레나무도 가문비나무도 자신을 그리는 저녁, 첫눈 내려 풍경마저 여백으로 돌아서면 자작나무 흰 뼈가 물감 다 짜낸 튜브처럼 일어선다
♧ 정곡正鵠 - 洪海里
보은 회인에서 칼을 가는
앞못보는 사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일을 하는지요
귀로 보지요
날이 서는 걸 손으로 보지요
그렇다
눈이 보고 귀로 듣는 게 전부가 아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지 않던 것
언제부턴가 슬몃 보이기 시작하고
못 듣던 것도 들린다
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
귀 막고 있어도 손이 보는 것
굳이 시론詩論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
빼어난 시안詩眼이다
잘 벼려진 칼날이 번쩍이고 있다.
*月刊『우리詩』2019년 12월호(통권 제7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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