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이란? - 이제우
비 오는 어느 날 선술집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담론
인생이란?
누구는 연기煙氣라 하고
누구는 연기演技라 하고
또, 누구는 연기緣起라 하네.
누구는 일장춘몽이요 새옹지마라 하고
누구는 고해苦海며, 생로병사라 하고
또 누구는
‘다만 모를 뿐’이라며 입을 다무는데
장님 코끼리 만지듯
사람마다 각양각색, 천태만상
정녕, 인생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가 보다.
♧ 늙은 트럭 - 정유광
경부 고속도로 무심히 지나가는 고물 트럭
엉덩이를 촐싹대며 충혈된 눈 부릅뜨고
후들대는 다리로 삐뚜름히 짐짝 업은 채
엉거주춤 터덜터덜 달팽이처럼 끌면서
점선을 넘나들며 한쪽 눈 깜빡깜빡
살아온 생 덜커덩 신음은 허공 닿고
차가운 도로에서 버둥대는 시간 속
저 멀리 십자가 불빛 서서히 굴절되어
무거운 짐 진 자들 어서 와서 쉬라고
어둠을 뒤집어쓴 적막한 깊은 터널
빨간 미등 흔들며 비실비실 기어 나온다
비로소
온몸 고장 나
나이 듦, 깨닫는 길
♧ 또, 봄으로 읽히는 봄 - 이종근
내 두터운 내복 사타구니에 냉정하게 묻은 건 북쪽 겨울이 내걸린 안녕이 아닙니다
내 빨개진 볼에 스치는 건 이별의 키스처럼 마지막으로 몰아치는 시린 바람이 아닙니다
내 심장에 온통 꽃무늬로 솟구치는 따스한 햇볕 한 줌으로 불끈불끈 불거지는 사랑입니다
내 생각에 봄 내를 한가득히 담고 또, 봄으로 읽히는 봄 아지랑이 한 뼘의 푸릇푸릇한 축복입니다
사계가 뚜렷한 동네 한 바퀴를 무사히 돌아, 봄으로 왔습니다
완주의 메달을 받아 쥐는 이 봄의 영광은
하늘이 주신 푸른 명령입니다
내 주름진 목숨에 마땅히 걸어보는 나이 한 살 더 참 고맙습니다
♧ 미륵사지에서 – 정형무
선화공주님 서동과 얼려
죽어도 천년만년 살고지고
청산에 비구름 비껴가고
탑 돌아 다시보마 손가락 걸었던
내 님의 선홍색 방형우산方形雨傘)이
너른 땅 한 마당
은구슬 꿰어 내리는 빗방울 속에
저 홀로 흥에 겨워 둥둥 떠돌아
아소 님하
백 년도 못 살 님하
저 하늘 멀리 던져버리고
단내 나도록 내 품으로 안겨 오소서
♧ 모란꽃 – 이순향
살가운 봄바람이
오가며 지은 시를
도톰한 심장에다
한 땀 한 땀 새겨 두면
수천 년
왕국의 신비
자주 휘장 펼친다
♧ 길에서 기린을 만난다면 – 정옥임
길에서 기린을 만난다면
시를 읽고
길한 동물 기린을
길에서 만난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어릴 때
2만원에 팔려가
한글도 못 배운
문해학교 김묘순 할머니
그 할머니를
기린 등에 앉혀
오래오래 태워주고 싶다
♧ 사소한 진리 – 여국현
숲 속의 새를 날아 잡아 가둘 수 없어요
새를 부르는 것
내가 숲이 되는 길뿐이지요
자유로운 그대를 사랑으로 옥죌 수 없어요
그대를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이 되는 길뿐이지요
바람의 노래 시를 마음만 뻗쳐 품을 수 없어요
시를 품는다는 것
내 삶이 시가 되는 길뿐이지요
*시 : 월간『우리詩』2020년 07월 통권 385호에서
*사진 : 여름 숲에서 하늘을 찾다(2020.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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