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우리詩' 2020년 7월호의 시와 숲

김창집 2020. 7. 9. 12:56

인생이란? - 이제우

 

비 오는 어느 날 선술집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담론

 

인생이란?

 

누구는 연기煙氣라 하고

누구는 연기演技라 하고

, 누구는 연기緣起라 하네.

 

누구는 일장춘몽이요 새옹지마라 하고

누구는 고해苦海, 생로병사라 하고

또 누구는

다만 모를 뿐이라며 입을 다무는데

 

장님 코끼리 만지듯

사람마다 각양각색, 천태만상

 

정녕, 인생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가 보다.

 

늙은 트럭 - 정유광

 

경부 고속도로 무심히 지나가는 고물 트럭

 

엉덩이를 촐싹대며 충혈된 눈 부릅뜨고

후들대는 다리로 삐뚜름히 짐짝 업은 채

엉거주춤 터덜터덜 달팽이처럼 끌면서

점선을 넘나들며 한쪽 눈 깜빡깜빡

살아온 생 덜커덩 신음은 허공 닿고

차가운 도로에서 버둥대는 시간 속

저 멀리 십자가 불빛 서서히 굴절되어

무거운 짐 진 자들 어서 와서 쉬라고

어둠을 뒤집어쓴 적막한 깊은 터널

빨간 미등 흔들며 비실비실 기어 나온다

 

비로소

온몸 고장 나

나이 듦, 깨닫는 길

 

, 봄으로 읽히는 봄 - 이종근

 

내 두터운 내복 사타구니에 냉정하게 묻은 건 북쪽 겨울이 내걸린 안녕이 아닙니다

 

내 빨개진 볼에 스치는 건 이별의 키스처럼 마지막으로 몰아치는 시린 바람이 아닙니다

 

내 심장에 온통 꽃무늬로 솟구치는 따스한 햇볕 한 줌으로 불끈불끈 불거지는 사랑입니다

 

내 생각에 봄 내를 한가득히 담고 또, 봄으로 읽히는 봄 아지랑이 한 뼘의 푸릇푸릇한 축복입니다

 

사계가 뚜렷한 동네 한 바퀴를 무사히 돌아, 봄으로 왔습니다

 

완주의 메달을 받아 쥐는 이 봄의 영광은

 

하늘이 주신 푸른 명령입니다

 

내 주름진 목숨에 마땅히 걸어보는 나이 한 살 더 참 고맙습니다

 

미륵사지에서 정형무

 

선화공주님 서동과 얼려

죽어도 천년만년 살고지고

 

청산에 비구름 비껴가고

탑 돌아 다시보마 손가락 걸었던

내 님의 선홍색 방형우산方形雨傘)

 

너른 땅 한 마당

은구슬 꿰어 내리는 빗방울 속에

저 홀로 흥에 겨워 둥둥 떠돌아

 

아소 님하

백 년도 못 살 님하

 

저 하늘 멀리 던져버리고

단내 나도록 내 품으로 안겨 오소서

 

모란꽃 이순향

 

살가운 봄바람이

오가며 지은 시를

 

도톰한 심장에다

한 땀 한 땀 새겨 두면

 

수천 년

왕국의 신비

자주 휘장 펼친다

 

길에서 기린을 만난다면 정옥임

 

길에서 기린을 만난다면

시를 읽고

 

길한 동물 기린을

길에서 만난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어릴 때

2만원에 팔려가

한글도 못 배운

문해학교 김묘순 할머니

 

그 할머니를

기린 등에 앉혀

오래오래 태워주고 싶다

 

사소한 진리 여국현

 

숲 속의 새를 날아 잡아 가둘 수 없어요

새를 부르는 것

내가 숲이 되는 길뿐이지요

 

자유로운 그대를 사랑으로 옥죌 수 없어요

그대를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이 되는 길뿐이지요

 

바람의 노래 시를 마음만 뻗쳐 품을 수 없어요

시를 품는다는 것

내 삶이 시가 되는 길뿐이지요

 

 

                               *: 월간우리202007월 통권 385호에서

                               *사진 : 여름 숲에서 하늘을 찾다(2020.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