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 그리고 나는 – 박은우
소는
자면서도 결코 머리를 땅에 내려놓지 않는 지존
오랜 사유와 깨달음으로 굳어진 뿔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크고 맑은 눈
하루를 세세하게 되돌아보는 되새김질
고행을 통한 자기 수행의 다짐 같은 코뚜레
그리고 저 힌두교의 어머니
나는
조금만 힘들어도 머리 처박고 드러눕는다
생각은 많지만 깨달음의 관冠이 없다
본질을 굴절시켜버리는 편견의 눈을 가졌다
아집我執에 갇혀 누구의 원망이나 눈물을 보지 못한다
수양을 위한 고행보다는 양지만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어디에도 기억됨이 없는 유랑자
생각이 환히 보이는 소의 눈처럼
감출 것 하나 없는
양심이 해맑은 나는 어디쯤 있을까
♧ 옹이 – 백수인
가슴에 사무친 멍울
그 멍울 위에 덧씌운 또 하나의 멍울이다
삶의 고갯마루 오를 때 내뱉는 한숨
그 한 숨 위에 겹치는 차디찬 한숨 덩어리다
겨우 아문 상처가 덧나서 곪아터진 아픔
그 세월 견뎌낸 흉터다
허허벌판 뺨에 휘몰아치던 칼날 같은 바람의 뼈다귀다
거칠고 험한 길 걷고 또 걷다가 주저앉은 자리
다시 포효하며 일어나 걷던 그 자리의 굳은살이다
정의가 구겨지고 역사가 곤두박질 칠 때
솟구쳐 오르는 분노, 그 뜨거웠던 피의 탁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뒷골목으로 돌아올 때
가슴에 차오르던 눈물의 단단한 응어리다
모든 아픔 참고 이겨낸 삶의 흔적
죽으면 보여주려고 감추어둔 사리舍利다
이순 넘어 산 하나 넘어
이 따뜻한 골짜기에 들어 당신의 각진 모서리를 만지다가
이제야 비로소 보았다. 옹이를
♧ 달을 품은 종려의 이마는 높이를 가진 통증 같다 - 유병란
스스로 잎을 찢어 허공으로 길을 내는 일은
종려나무가 사는 법
갈라지거나 휘어지거나의 숙명을 거부한 채
지하 동굴 암흑에서 진화를 거듭하는 생명체 같은 종려
뾰족한 날을 세워 너의 심장에 상처를 낸 적 있는 나는
가장 어두운 부분을 만지면서 나무의 고통을 바라본다
종일 뾰족한 잎을 벌려 빛을 모으던 종려의 절박한 향일성
한밤중이 돼서야 관절을 비틀어 발목이 부은 뿌리를 뻗는다
달빛 숨소리 따라가며 숲이 잠든다
홀로 깨어 새잎을 찢어 길을 내는 서늘한 몸짓
그때 달이 품은 종려의 이마는 높고 아름다운 통증 같다
댓잎을 밟으며 밀려오는 새벽안개가
돋아난 상처를 하얗게 덮고 있다
하늘로 달려 나가 하늘이 된다
* 시 : 월간 『우리詩』08월 386호에서
* 사진 : 여름새우란(2008.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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