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처서 지났으니, 더위야 물렀거라

김창집 2020. 8. 24. 00:21

별로 나이가 들지 않았는데도 확실히 더위에 약해진 것 같다.

누가 얘기하기는 올해는 유난히 더워서 그렇다는데,

에어컨을 켜고 누우면 차차 다리가 저리는 일은

올 처음이다.

 

그리 크지 않은 나라라지만

어떤 곳은 비가 너무 와서 탈이고

제주시 같은 곳은 가물어서 탈이다.

 

같은 한라산이라도

금요일날 어리목 어승생악을 가보니,

조그만 연못은 바닥을 드러내고

수련잎은 마른지 오랜데,

어리연만 전날 저녁 한 줄기 비에

꽃을 겨우 피웠다.

 

한라산 어느 쪽으로는

단번에 수백 mm를 기록한 해인데

그런 걸로 보면 세상 고른 것 하나도 없다.

 

어제가 처서(處暑)였으니,

더위야 당장 물렀거라.

 

처서處暑

 

풀벌레 소리 투명하여

귀그물[耳網]에 걸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귀 기울여 들어보니,

 

무소유無所有란 소유한 것이 없음이 아니라

라는 가장 큰 것을 소유함이니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인 것처럼

와 무는 하나니라하고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속도 절도 없는 내 귀에 들릴 리 있겠는가

속절없는 일이다!

 

투명한 것은 바로 칠흑이라서

그냥 귀에 가득 차는 것이니

들어도 들리지 않는 허공일 뿐

소리 없는 노래였다.

 

그것이 바로 무소유였다.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도서출판 움, 2016)

 

처서 무렵 - 박덕중

 

한여름

불칼 휘두르던 번개

하늘 무너질 듯 쾅쾅 대던

천둥소리도

멀리 사라지고

 

가을의 언덕

태아를 위해

고개 숙여 묵상하는 오곡들

 

어머니 같은 마음

사랑 듬뿍 쏟아

태아의 속살 위해

 

하늘도 사랑 베풀어

황금빛 햇살

열매 속 물이 들 때

 

만삭이 된 들판

바람도 조심조심 스쳐 가고

어디서 망치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처서 무렵 2 - 박종영

 

대장간 풀무질에 번득이는

불꽃이 아니더라도

가슴 데우는 늦더위에

손바닥 부채로 불러들이는 서늘한 바람

 

처서 지나고 나면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에도 누그러질 거라 믿었던

초가을 볕은 아직도

까마귀 대가리에서 번들거리고

 

푸른 논배미 장리 벼는

올올히 배부른 이삭 배고 서서

스적스적 윤기를 더해가고

 

만물*에 논 구석 돌아치며 뽑아내는

아득한 들소리 밀려오면

덩실덩실 허드렛일꾼 어깨춤이

절로 풍년이네

 

---

* 만물(농업) : 그해의 벼농사에서 마지막으로

                  논의 김을 매는 일

 

처서處暑 - 박얼서

 

발톱 세우던 더위가

담장 밖 동태를 살핀다

 

입추를 지나온 군상들

바람의 서곡들만을 골라

세월의 길목 부릅떠가며

이십사절기를 센다

 

시간여행 벌판을 달렸어도

아직 때 이른 가을자리

 

저 너머 백로(白露)

좀 더 가까이

한 달음에 내달려오도록

하늘 길을 닦고 있다.

 

처서 소묘(素描) - 박인걸

 

낮달 선명한 하늘에

햇살도 기가 꺾이고

느티나무 짙은 그늘에는

엷은 한기가 맴돈다.

 

귀뚜라미 처량하고

풀벌레 울음 애절한데

곱게 분장한 코스모스는

그리움을 가득물고 있다.

 

거칠게 부대끼며

생존의 몸부림으로

치열한 계절을 넘어온

野草야초들이 숭고하지만

 

이미 끝난 게임

점점 기우는 분위기

白露백로가 저만치서 기다린다.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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