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산사 의상대 노송 일출 - 박희진
의상대 앞바다, 망망대해에
자욱했던 어둠을 노송은 빨아들여,
혼신의 힘을 다해 밤새도록
시나브로 빨아들여
마침내 노송이 칠흑의 묵송 되자
수평선 뚫고 해가 솟아올라
바다 위에 황금의 기왓장 까누나。
해 바다 소나무가
제각기 극명한 제 모습 지니면서
간격이 없는, 완벽하게 하나를 이룬
이 찰라 속 영원의 조화 보라。
이 아름다운 극치의 황홀 보라。
*2012년 수상자
♧ 숲의 소리를 들었는가 - 조병무
아무도 모른다
숲의 소리를
이웃하는 새들이 찾아와
들려주는 새벽 무한의 소리를
누군가 엿듣다 달아나는
시늉 속에 숲은 마음을 연다
늘어진 나뭇가지 붙들고
세상 찾아 헤매는
청설모 다람쥐 오고 갈 때
들었는가 또 한 소리를
숲은 흔들리며 마음을 숨긴다
어느 결
나뭇잎 사이사이 스며드는
조각난 햇빛 모서리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바람의 흔적으로
숲은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다
사람들아
숲과 살아가는 그 많은 생명과 환희
그들 삶의 소리는 소리일 뿐
숲의 형상에 숨겨놓은
영령들의 미소 따라
조용한 울림으로 오는
잔영의 의미를
아무도 모른다
숲의 소리인지를
*2014년 수상자
♧ 비밀의 숲 - 김후란
-자연 속으로․1
나는
파도의 옷자락을 끌고
이 숲으로 왔다
변화를 기다리는 생명들이 있었다
바위조차 숨죽이고 기다렸다
푸른 잎새들 이마에
천국의 새 모여들고
들꽃을 피우려
비를 기다리던 산자락에
바다가 입을 맞춘다
겹겹 옷 입은 산 황홀하여라
비밀의 숲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어린 나무들과
키 큰 나무들의 숨소리에
저 소리꾼의 진양조 가락이 울린다
눈부셔라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면서
아침햇살에 비를 번득이는 바다처럼
신은 살아 있다 청렬하고 푸근하다
신神이 만든 숲이다 나를 끌어안는다
나는 영혼의 긴 그림자를 끌고
천천히 걸어간다
*2015년 수상자
♧ 나무 - 임보
―산상문답․3
[물음]
스승님,
눈도 코도 없이
한평생 한 곳에 붙박여 사는
저 나무들은 얼마나 어둡고 답답할는지요?
[대답]
네 눈이 천 리를 보고
네 귀가 백 리를 듣는다고 치자
그러나 저 허허한 우주의 다락에서 내려다보면
네가 거느린 세상도 좁고 좁다
네가 한 마리 개미의 더듬이를 우습게 보듯이
만 리의 더듬이를 가진 자가 너를 본다면
네 눈과 귀 또한 얼마나 가소롭겠느냐?
그러나 생명의 의미는
더듬이의 길이로 측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눈을 지닌 자는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귀를 가진 자는 들리는 것에 마음을 기울인다
만 리를 보는 자는 만 리의 근심을 안게 되고
천 리를 듣는 자는 천 리의 걱정을 지게 된다
보도 듣도 못한 한 그루 측백나무가
천 년을 사는 것을 너는 아직 못 보았느냐?
그들에겐 근심이 적다
어둡고 답답하리라 염려하지 말라
움직이지 않으니 더듬이가 무슨 소용일까
그러나 그들도 필요한 건 몸으로 다 안다
우리는 눈 귀 닫으면 온 세상이 어둡지만
그들의 몸은 늘 열려 있어서
어둠의 밤이나 폭풍의 낮이나
언제나 한결같이 밝다
무엇으로 그것을 아느냐고?
보라, 햇빛을 만나면 잎을 열고
봄이 오면 꽃을 피우지 않더냐
그들이 왜 답답하단 말이냐.
*2017년 수상자
*산림문학 2020년 가을호(통권3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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