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나영애 시집 '각설탕이 녹는 시간'(2)

김창집 2020. 11. 14. 00:18

 

금년에는 몇 차례

태풍이 제주 섬을 스쳐 가서

단풍잎 색이 짙어질 겨를이 없었다.

 

밖으로 노출된 잎들은

벌써 떨어져버리거나

상처 난 부위로 바이러스가 침투되어

말라버리거나 얼룩이 졌다.

 

그래도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을 덜 탄 잎들은

그늘이어서 색이 짙어지지 못하거나

아직 다 물들지 못했다.

 

그래도 지난 일요일

고운 것을 열심히 찾아 찍어다

편집해서

보내온 시집의 시들과 맞춰 올린다.

 

 

그대는 활력소입니다

 

암울한 결과로

활동의 날이 짧아질 것 같아

묻어 두었던 것들이

서두르라 합니다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시간

전하고 싶은 별 같은 말이 있거나

품 넓힐 일이 있다면

지금 하라

깃발처럼 펄럭입니다

그대에게 깃발 보이거든

토닥임 한마디 보내 주십시오

내 낡아가는 육신에

새 세포 하나 만들어질 것입니다

내 안의 것이 날 괴롭혀

삶의 깊은 골짝까지 들여다보는

또 다른 혜안이 열릴 것이라 기대하며

뚝배기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리고

수분 팩을 얼굴에 붙이고 눈썹을 다듬으며

좋아하는 옷을 골라 입을 것입니다

그대와 내 안의 그대

암을 위해

 

 

한 수 깨우침

 

코로나19 옥살이에서

탈출의 길 나섰다

풍경을 지나가는 길

갖가지 봄 냄새가 감격스럽다

 

곰삭은 인분을 만난 흙냄새

봄 밭의 어머니를 모셔오고

연 방죽은 깊은 곳에 묻은

안타까운 사랑의 기억을 쑥쑥 밀어 올린다

사람 체취와 비벼진 낭만의 향기, 커피집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간절하다

 

유통기간 지나 삭아 없어진

사랑이라도 불러 지난날의 젊음을

종달새처럼 조잘대고 싶다

밤 고양이처럼 양양 거리고 싶다

 

전염병에게 배운

한 수 깨우침

사람과 사물에 감사하라고

귀하지 않은 게 없다고

 

 

우리

 

귀에 붙임 없이

흔히

흘러가버리는 단어였네

 

어느 날 그가

더 좋은 날이 있을 거예요, 우리

표정도 소리도 없이 남긴 활자

 

한 단어에

두 사람을 하나로 묶는

우리라는 말

그만 눈꺼풀이 뜨끈해졌네

 

우리, 이토록

아름다운 말이었나

지친 마음 토닥이는 말이었나

 

 

기억의 저편

 

소한도 훌쩍 지나

찔레 새순처럼 살져오는 햇살

나목의 가지마다 하얗게 내려앉았습니다

 

영원사의 여름

사람과 벌 나비 한데 어우러지고

연화 향이 풍경을 둘러싸던 미목美木 아래서

속눈썹 가지런히 내리고

계절을 노래하던 그대

 

익었다 싶으면 낯설고

낯선가 싶다가도 가까워

 

가슴속 알 수 없는 꽃들이 폭죽 되어

허공을 찢으며 오르던 것을 보았는지요?

환희의 그 순간

꽉 멈추었으면 했지요

 

겨울은 그날의 아쉬움을 꽁꽁 묶어 두었지만

점심 먹은 햇살은 통통해져

가지마다 물을 돌리고

연두 새아가 옹알이할 것 같네요

아지랑이 어질어질하여

꽃들이 연이어 향기 주머니 터트리겠네요

 

우리의 기억 속에 잠자는 아쉬움 깨우면

그대와 나 관심의 꽃도 피울 수 있을까요?

 

 

산책길에서

 

이어폰을 타고

심장으로 흐르는 멜로디

발걸음이 올라탔다

 

밤의 분위기 반달 조명

달이 질 때까지 걸어 볼까

 

허리 쭉 올려 펴고

바람을 헤치며

봉긋한 가슴이 앞서 간다

 

땅을 차고 오르는 발

넘쳐 나는 에너지

초록 이파리 향도 가라앉히질 못하네

 

허공을 달리는 기차도 개구리도

세레나데 부르네

 

참나리 꽃처럼 피어나는 미소

품어 감출수록 넘치는데

 

불기둥을 안고 여울져 흐르는

개울물은 알까

 

그대 안개꽃으로 와

내 안의 꽃과 만나 춤추는 이유를

 

 

원초적 본능

 

나무와 새는 밤새도록

얼굴을 비비고 꽁지를 까딱거리며 놀았다

어느 순간 새는

다른 나뭇가지 위에 앉아 노래하고 있었다

나무는

미간을 찡그리고 볼이 흘러내리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움직이는 것들은

한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잊었던가

떠나보내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몸이 축축 젖어 있다

 

전문가는

원초적 본능이 꿈틀거린다고

건강해 졌다는 기록이기도 하다고

깊어진 노을을 바라보는 나이에

원초적 본능이라니

 

저승 문 앞에 다가선 사람이

간병인 아주머니를 터치한다는

그분도 원초적 본능?

 

 

               * 나영애 시집 각설탕이 녹는 시간(도서출판 움, 202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