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시
어젯밤, 아픈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태풍으로 땅이 얼려서 상사화가 죽순처럼 돋아났다고 고사리처럼 피어났다고 그런데 곧 진다고 내일 만나자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화 했더니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딴소리다. 뜬금없이 시가 뭐냐고 물어온다. 나야, 말문이 막혀서 그게 뭐냐고 되물었더니 ‘인정머리’라고 했다. 그거 없으면 시도 뭣도 아니라고 했다. ‘아, 시가 사람을 감싸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뒤가 켕겼다. 이제까지 그가 귀찮아서 거리만 두었다. 오늘은 시가 되어서 자리 깔아놓고 들어주기로 했다. 길게 들어주는 게 시였다.
♧ 사랑 하나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풀씨 하나
내 집에 자리 잡았다
움트는 것은
모두가 부끄럼이었다
그리움 하나
내 밭에 뿌리내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노래 하나
감자야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감자야 감자야
피고 지는 것은
모두가 피멍이었다
사랑 하나
내 안에 시퍼렇게 물들었다
♧ 손님
가난한 옛날에는
눈도 많이도 내렸다
사흘 밤낮을 쏟아져서
길이 막히고 이웃이 끊어졌다
그려도
집집이 생활은 이어졌다
저녁연기 피어났고
외양간에서는 수죽이 끓었다
밤에는
멧돼지나 고라니가 다녀갔다
바람벽에 차려진
비상한 밥상에 경배하면서
먼 산골 이야기 전해주고 갔다
그런디 지금은
눈도 없는 여름에도
멧돼지나 고라니가 다녀간다
비상한 밥상을 뛰어넘어서
아픈 산골 이야기 전해주고 간다
♧ 닭울음소리
그대 멀리서
목울대 길게 빼고 홰를 치면서
세상의 곤한 잠 서둘러 깨우시는가
어서 일어나라고 어서 새날 열어가라고
앞뒤 재지도 않고 연거푸 소리소리 하시는가
그대 멀리서
아득한 먼 옛날의 울음으로
하늘에 치밀어 광야를 역사하시는가
이 산 저 산 하얗게 피어나라고
잃었던 전설 불 댕겨 불끈거리게 하시는가
갑오년의 말목장터에서도
기미년의 아우내장터에서도
4.19도 5.18도 6월 항쟁도 붉은 울음이었지
동에서도 서에서도 강 건너에서도
고요가 터지고 하늘땅 새로 열리는 감격이었지
그대 멀리서
혼신의 힘으로 내 안의 태만 꾸짖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울음은 울음이라고
이쁜 고집으로 내 안의 감옥 무너뜨리는가
곡두여 깨어나라고 잎싹아 솟아나라고
♧ 곡비
조석전에 곡소리
무시곡이 슬프다고
상주가 동전 한 닢 던졌다
호곡하는 소리
고만하면 일품이라고
문상객이 동전 한 닢 던졌다
곡비는
내하강도 건너가고
유황불도 데이면서
떠도는 망자를 달래야 한다
애곡하는 소리
눈물 콧물 지으면서
진창길 진창으로 만들어야 한다
밤을 새워 비를 뿌리고
낮을 새워 혼백을 태우면서
상심한 소릿길 가야 한다
진정 심금이 되어서
소름이 돋고
끊어질 듯 찢어질 듯
머리 풀고
지팡이 짚고
굽은 등에도 울음이 산다
인제 가면 언제 오냐고
물이 깊어 못 가겠다고
가는 길 영거에서 막아섰더니
푸른 벌판이 굴절이 된다
* 최기종 시집 『목포, 에말이요』(푸른사상,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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