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광렬 시 '들판에 꽃 보러 갔다가' 외 4편

김창집 2021. 2. 22. 12:26

들판에 꽃 보러 갔다가

 

들판에 꽃 보러 갔다가 꽃 다 져 아쉬운데

 

들판에 꽃만 꽃이 아니라

 

내 안 외로움의 꽃도 꽃이고

 

우리 집 화분에 피어 있는 꽃도 꽃인 것을

 

가까이 있는 꽃은 몰라보고

 

멀리 있는 꽃만 가슴 설레며 보러 갔다

 

풀꽃 향기를 기다리는 밤

 

맑게 깨어나는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밤은 두 다리 길게 뻗어 깊은 잠에 들고

나는 거기에 한 다리 걸쳐보지만

잠이 오지 않아

한밤 내내 머리가 무겁다

 

누가 왔으면 좋겠다

문 두드리면 얼른 달려가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문 쪽에 꽂혀 있다

누가 와서 문 좀 두드려다오

어서 병든 나를 꺼내 다오

뒤척이는 나를 껴안아 다오

 

시기와 질투와 아집과 편견이

무수히 자라나는 밤,

비워 내야 한다며 더욱 욕심이 커나가는 밤,

아침 창가에 머무는

싱그럽고 맑은 풀꽃 향기가 그립다

 

그대가 늘 그곳에 있어

 

슬프나 기쁘나 늘 그대가 그곳에 있어

 

나 그대에게로 간다

 

그대 먼저 나를 찾지 않아도

 

그대에게로 가는 발걸음 힘들지 않다

 

그대가 먼저 나에게로 오지 않아

 

섭섭했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참 미안했었다고 말해준다면

 

이 세상 끝나는 그 날

 

그대 고운 눈길로 나를 보내주리라

 

살아가는 소리들

 

적막을 찾아 숲속으로 갔다

적막은 어디서 고른 숨 쉬고 있을까?

 

숲속에도 살아가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나뭇잎들 사르르 쉴 새 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나무와 나무 사이로 햇살 반짝거리고

집을 빠져나온 개미들 어디론가 줄지어 가고

딱따구리들이 딱, 딱 나무를 쪼아대고

부지런히 풀 뜯던 수노루들

뿔 맞대어 싸우기도 하고

바람 타며 까마귀들 간간이 울부짖고 있었다

 

노동 없이 저무는 하루는 마치,

숨죽인 시간들보다 더 괴롭다는 듯

 

어느 작은 새의 죽음

 

입에 하얀 거품을 물고 그 작은 새는 죽어갔다

한때 사랑하는 애인 앞에서

나 보란 듯

꽃나무 위를 날렵하게 스쳐 지나기도 하고

떨며 거센 비바람 헤쳐 나가기도 했을

은빛 날개 앞에서 나는 처연해졌다

 

내가 보다 젊은 시절에 죽음은 두려웠고

지금도 두렵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나 보란 듯 재빠르게 걷지 못하고

번쩍 무거운 짐을 들 엄두도 못 내는 일이다

 

 

                                     *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천년의 시작, 2020)에서

 

* 사진 설명 : 중의무릇

 

백합과의 중의무릇은

동아시아를 비롯한 북반부에 주로 서식하며,

꽃말은 일편단심이다.

 

서양에서는 베들레헴의 노란 별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데,

얼마 전 이른 봄에 발틱 3국을 들렀다가

어느 공회당 마당 전체가 잔디처럼 이 꽃이 번져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어떻든 추위를 이기고 일찍 피는 꽃이기에

2월에 벌써 피어나고,

북부유럽에서도 잘 자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