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어머니 등 뒤에 핀
낮에 뜬 별을 연민하다가
오대산 햇살 따라 핀 나무 그림자들로
두 번째 시집을 묶는다.
하늘에 몸을 열었던 산목련 꽃그늘이
깊이 산을 품었던 날들이
나를 빠져나간다.
가을 오대산은 달빛에 더 깊어졌다.
2020. 가을 오대산 기슭에서
윤병주
♧ 풋사과를 먹는 저녁
지상의 날짜들을 잘못 짚고 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둘러 잎을 떨군 나무들의 일정 때문일 것이다
기온을 잘못 읽은 어떤 충동들이
제 몸 안의 자각 없는 고행을 바라겠는가
고행의 날을 단맛으로 숙성시키고 싶지 않았을까
지금은 풋내 나는 볼온한 계절을 건너가고 있는 저녁
태양의 궤도를 착각한 사과를 먹고 있다
나는 가끔 단맛을 채우지 못하고 빛을 투과해
명중할 수 없는 빛의 자각을 채우지 못한 것들이
궁금해지는 저녁이 있다
나무와 햇살과 바람이 단맛을 채우며 뒤척이던 밤을
시큼한 맛이 고이는 궤도의 시간으로 걸어가 보고 싶기도 했다
양분을 놓칠 수 없는 안간힘을 다했던 꼭지를
더 붙잡았던 힘을, 열매는 수차례 들어가 보기도 했을 터
허나, 떨어진 것들의 궁핍한 맛들은
어느 계절의 바람에 단맛이 말소되었던 경계지점일까
사과 껍질을 벗기면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은 빛이,
빗나간 각도의 맛이 시큼한 저녁
지불이 끝난 맛을 별빛 속에 끌어들인다
♧ 산목련
비가 언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고 나니
봄 하늘이 송사리 떼가 지나간 물처럼 투명하다
봄 농사일이 한참인데
나는 몸이 아프고 밥맛이 씁쓸하다
가끔은 척도를 벗어난 곳을
고치고 달래며 살아가야 하는데
산맥의 바람과 후미진 곳에 몸을 숨기던
한낮의 뜬 별처럼 바람을 삭히며
나무 위 꽃들이 몸을 열어놓았다
몇 날을 깊은 잠에 들어서지 못했다
아픔이 지나고 나니 고단한 낙타가
살아온 짐을 벗고 큰 영을 넘듯
바람의 공적으로 핀 꽃들이 가까이 와 있다
꽃잎이 구름처럼 살고 있는 이 산중에서 나는
바람에 밀려온 사람처럼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 나무 시집 보내기
며칠 황사바람이 불더니 비가 내린다
늙은 신배나무 물올림 시작됐는지
나뭇가지의 맥박들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궂은 날 정월 대보름
구름들이 하릴없이 지루한 겨울날
사물놀이 징소리가 마을 어귀 신배나무를 깨우고
동네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에 돌과 새끼줄을 얹어서
아직은 날이 차지만 나무는 초례를 치른다
산골 구름의 안부 궁금해할 나비
아직 날아올 날 멀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벌써 꽃과 나비의 합궁 날을 택해
나무에게 주문을 건다
지나간 날과 길흉 종이를 하나씩 채우고
남쪽 구름을 불러 나뭇가지에 건다
볼이 불어진 산골 나무들은 무거운 돌을 가슴에 얹고
혼례 날을 기다리고 있다
주술의 힘이 나무에 맞닿으면
나무들의 폐는 한결 젊어질 것인가
아직은 나비와 벌은 나무로 돌아올 수 없고
허공의 장신구로 서 있기만 한데
공중의 태양이 달을 괜히 불러와
나비와 벌이 올 거라며 입소문을 내고 있다
하릴없는 동네 숫총각 나무들도
한겨울을 접고 멀리 돌아올 남동풍으로
산골 방언 소리 외우기 시작한다
산마루 쪽 봄이 올 때는 아직 멀었는데
나무들의 몸짓이 심상치 않다
가려운 아랫도리를 긁는 나무들이
따뜻한 바람을 불러들이려 애쓰고 있다
♧ 항구의 봄
-k아줌마
어판장 앞 고양이 한 마리가
아침 햇살을 주워 먹고 있다
먼 바다의 갈매기를 바라보는 중년의 여인
그녀가 생을 담아내고 싶은 곳은 포구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등줄기처럼 건기에 빠져있는 무료한 집
라디오 소리에 빨래가 마르는 언덕의 집이었다
하늘 심장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은
그 어디쯤에서 살고 싶었으나 운명은 그녀를
비린내를 끌고 다니는 갈매기들의 거처
어판장에 묶어 두었다
새벽 항구 경매된 생선들에 붙들려
청춘을 말려야 했다
날이 가도 줄어들지 않는 바닷가 사연들
바다가 조업을 줄이는 날에도
거친 사내들의 소주병과 은칼 위 생선들을 썰어
생활들을 꾸리는 사이 금어기가 왔고
바다의 한쪽은 불경기의 날들이 갔다
저녁이 밀려오는 푸른 바다의 수심을
애써 정리하는 그녀의 몸
무쇠 닻처럼 살아온 날들이 빠져들고 있다
윤병주 시인의 시편들은 바다에서 파도에 밀려오기도 하고 산에서 바람을 타고 내려오기도 한다.
일테면 강릉 주문진 일대의 동해 전부와 대관령이나 진고개, 큰 영들이 그의 자신이자 시의 영역인 셈인데
시인들의 나라에서 이만한 시적 영토를 갖기란 쉽지 않다. 그곳에 깃들어 있는 그는 나는 가끔 상처가 많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내가 그들의 상처가 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며 현실의 곤고함을 노래하거나 상원사 앞산 팥죽을 끓이는 법당을 향해 백팔 배를 올리는 마가목들처럼 수행적 삶을 꿈꾸기도 한다.
-이상국 시인
* 윤병주 시집 『풋사과를 먹는 저녁』(현대시학사, 2020)에서
* 사진 : 요즘 한창인 서향(瑞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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