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틀거리는 언어
생각의 숲을 오르내리는 들숨날숨
등에 진 배낭에 꾹꾹 눌러 담아온 이야기들
풀숲 그늘에 앉아 살며시 풀어놓으면
간간이 부는 계곡 바람에 들꽃들 살가운 손짓 따라
풀 이끼 사이로 흐르는 잔물결 돌 틈을 맴돌다
어느 구비에 쉬어가야 할지
순간을 놓쳐버리고
아득히 먼 곳으로
비틀거리며 흩어져버리는 언어들
♧ 그대가 흐르는 강
지는 해 아쉬운 듯
붉은 노을에 그을린
애절하고 서글픈 봄날의 울부짖음
마른 바람도 빈 나뭇가지 흔들며 울고 있는 어스름
꽃봉오리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저승길 서둘렀던 한(恨) 비워내고
곱게 단장한 꽃무덤
서글픈 고통의 몸부림은
흘러가라 흘러가라고 기원했건만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는
여인의 가슴에 시련으로 멈추고
또 다른 아픔을 잉태한 피눈물은
옹이진 가슴에 붉게 뭉쳐
파리한 심장을 때린다
♧ 디카 속
숨 멈추고 “찰칵.”
떨리는 가슴은 얼어붙어
안개비 실바람, 살가운 마중에
흔들림 속 빛의 그네를 타면
렌즈 속으로 함초롬히 내려앉은
이슬의 꽃무더기
안개바람 쓰다듬어 설레는 마음
살며시 고개 숙여
바람의 속삭임에
들꽃이 이야기 속으로
오솔길 따라 소리 없는
마음 달려 머무는 봄의 숲
♧ 짐
바람의 속삭임에 이끌려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도심의 소음을 삼키는 사봉낙조(紗峰落照)
붉은 빛 잔잔한 일렁임 속으로
사라져 가는 흔적들
어깨를 짓누르는 내 짐들도 함께 풀어 놓는다
잠시 활활 타오르다가
이윽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번뇌들
까만 어둠이 살포시 어깨를 감싸 안는다
♧ 해녀콩
검게 그을린 얼굴에 더해진 골 깊은 주름살
살아온 날들 위로 설움 뒤섞여
신음소리도 내지르지 못해 안으로 삭히다
핵라 담아 내뱉는 숨비소리
비명소리조차 허용되지 않아 삼킨 울음
심장가지 갈기갈기 찢어져 토해낸
붉은 피
♧ 지신밟기
병풍을 둘러치고 제상 위엔 홍동백서
눈보라에 젖었다 말랐다 북어허리에
긴 실타래로 무병장수 엮어 시루떡 위에 올려놓고
죽어서도 웃고 있는 돼지머리 정 중앙에 자리하니
신사임당* 다소곳이 들어와 합장하고
세종대왕* 들어와서 궂은 액 멀리멀리 귀양 보내고
만복을 복조리에 담아
꽹과리, 징, 장구, 북에 가득가득 실어주신다
꽹과리야 번개같이
징아 태풍이 휘몰아치듯
장구야 쏟아지는 빗줄기같이
북아 둥실둥실 구름처럼
만복을 실어 백성에게 전하여라
한 다리 땅을 짚고 또 한 다리 하늘 향해
열 두발 긴 상모 온 우주 휘감아 춤을 춘다
상쇠가 꽹과리 치며 길을 나선다
징이 바람을 잡고
장구와 북이 하늘을 잡아
나풀나풀 지신을 밟는다
덩실덩실 춤사위 따라 집집마다
만복이 들어간다
만복이 들어간다
---
*신사임당 – 오만 원 권 지폐.
*세종대왕 – 만 원 권 지폐.
*이무자 시집 『비틀거리는 언어』(다층, 2017)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무등이왓 사람들 - 배진성 (0) | 2021.03.22 |
---|---|
김섬 시집 '혼디 지킬락' 발간 (0) | 2021.03.09 |
애월문학회 시화전과 벚꽃 (0) | 2021.03.07 |
최기종 시 '불청객' 외 4편과 살갈퀴꽃 (0) | 2021.03.02 |
김수열 시 '오리' 외 4편 (0) | 2021.02.28 |